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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May 31. 2018

영화 <소공녀> 후기

작지만 가장 확실한 행복을 그린 영화

1.

퇴근길 빨갛게 타오르는 십자가 아래 불꺼진 교회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저 빈 공간을 잠자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개방하는 건 어떨까. 밤엔 어차피 쓰지도 않는 공간이잖아. 저렇게 큰 공간이 있는데 서울역 버스정거장 한켠에서 혹한의 겨울을 난 할머니에게 쪽잠을 잘 공간 하나 내줄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예수님이 있다면 반대하지 않으실거야. 틀림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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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유자는 있지만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된 도심공간이 얼마든지 있다. '스쾃'이라고 하지. 관리가 되지 않는 도심의 공간을 거처없는 사람들이 점유해 사용하는거야. 공간을 소유가 아닌 사용의 관점으로 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 아닐까. 프랑스에는 이런 행위가 법적으로 보장된다고 한다. 몇년 전에 한무리의 노숙인들이 철거직전 삼일아파트를 점거하고 점유권을 인정받는 사례도 있다고 들었다. 철거시 충돌없이 퇴거한다는 약속만 이행된다면 글쎄, 좀 평화로운 방식으로 공간을 나누는 사회가 가능할수도 있겠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문득 공간의 소유자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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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따지고 보면 나는 가진 사람 쪽이다. 가끔 노숙인을 스쳐지나가며 감정이입을 하지만 그건 일시적 동정에 불과하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요즘 청년들이 겪는 생존의 어려움도 냉정하게 보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하루 벌어 하루사는 미소(이솜 분)가 왜 담배나 위스키 대신 집을 포기한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 같으면 담배를 끊고 위스키바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을텐데. 목돈을 모을 때 까지 뼈빠지게 고생해서 번듯한 방 한칸이라도 마련할텐데. 그런 생각으로 영화를 보다가 미소의 선배 최정미(김재화 분)가 미소에게 똑같은 충고를 하는 장면에서 나는 부끄러워졌다. 식비 보조를 받는 초등학생이 고급 돈가스를 먹는다고 민원을 낸 그 철면피와 나는 결국 같은 눈을 가진 사람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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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난한 사람에게도 취향은 있다. 비록 집은 없을지라도 눈앞에 당장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이 있다면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 소득의 반 이상을 아파트 장만에 들어간 빚을 갚는데 쓰고 있는 대용이(이성욱 분)가 고난의 이십년을 보낸 후에 얻을 수 있는 건 낡은 아파트 한채 뿐일 터. 가진 것 없는 청춘에게 '근검절약'의 교훈이 과연 쓸모있는 이야기이냔 말이다. 타인의 삶을 보편적인 눈으로만 획일화 하는데 내가 너무 익숙해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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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 때 풍성한 화음으로 뭉쳤던 다섯명의 밴드 멤버들은 모두 각자의 삶에 버겁다. 누구 하나 행복다 할수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모두 미소를 동정한다. 그런 친구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는 한강변에 천막을 치고 산다. 여전히 담배와 위스키를 즐기며. 어차피 세상은 더 힘들어질테고 더 비싸질 것이다. 어쩌면 집을 포기하고 확실한 취향을 선택한 미소가 가장 행복한 사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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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지막 한강 텐트 장면은 <김씨표류기>를 연상케 했다. 외환위기로 실직하고 빚더미에 올랐던 김씨의 삶과 요즘 구직난에 내몰린 청년 미소의 삶이 겹쳐보였나보다. 어쨌거나 도심에서 내몰린 자들은 강줄기를 찾아 스며드는구나. 원초적인 삶의 젖줄만이 그들을 보듬어 주는구나. 영화를 보고 일어설 때, 미소는 행복한지 모르겠지만 보는 나는 여전히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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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실 최근 본 영화중에 가장 어려웠다. 스토리나 구성이 난해한게 아니라 내가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 영화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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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공녀(Microhabitat)' 후기>

#영화후기 #무느와르 #소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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