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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n 13. 2018

머물것인가 새로 시작할 것인가

소설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실레스트 잉)> 후기

참 오랜만에 몰두해서 소설을 읽었다. 한 동안 더 이상 소설은 읽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서른을 넘기던 무렵이었고 육아와 직장생활이라는 단조로운 삶의 패턴 안에 갇혀있었다. 이야기가 전개될 때 과도한 감정의 낭비도 그렇거니와 끝난 후 밀려드는 공허함이 맘에 들지 않았다. 


승진 시험공부를 하거나 (법 전공자도 아닌데 이재상 같은 사람의 기본서로 형사법을 공부하려 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현학적인 책을 읽을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지적 컴플렉스를 그렇게 만회하려했던 것 같다. 


스무살 무렵, 곧잘 읽던 소설은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행하던 책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나 기욤뮈소, 박민규, 김연수 같은, 비교적 널리 읽히는 그런 책 몇권이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 또한 잠깐의 외도였을 뿐이다. 게다가 소설을 읽을 때면 쓰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금 읽다보면 어느새 무언가 쓰고 싶었다. 전체를 읽지 못하고 묘사에 매몰되었던 기억도 있다. 아무튼 소설과는 꽤 거리를 두고 살아온 셈이다. 

 

그런데 한달 전인가 우연히 들린 교보문고에서 카잔차키스의 <영국기행>을 사들고 온 날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영국기행>은 소설은 아니다. 카잔차키스가 2차대전 발발 직전 영국을 방문하여 쓴 기행문인데 여행중에 만난 사람들과 그가 겪은 사건들이 소설처럼 흥미롭게 묘사된다. 몇년 전 다녀온 그나라 몇몇 도시들의 이름이 떠올라 반갑게 읽었다. 문장이 여느 소설보다도 유려했고 영국이 처한 당시 상황과 역사에 대한 통찰이 대문호 답게 느껴진 글이었다. 

<영국기행>을 읽고나니 집구석에 굴러다니던 (아들놈이 읽던 책으로 추정되는)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정유정의 <7년의 밤>은 출퇴근 시간 몰입해서 읽기 좋았다. 전개가 빠르고 팽팽한 긴장감이 있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사념이 들 여지가 없었다. 이런 재미로 요즘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구나 싶었다. 평소 존경하는 모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로랑비네의 <언어의 7번째 기능>은 읽다가 중간에 멈춘 상태다. 롤랑바르트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작가의 상상을 더한 전개도 매력있었지만 푸코나 데리다 같은 학자들을 소설에서 만나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 소설을 중간에 잠시 쉬었던 건 실레스트 잉의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를 읽어야 했기 때문.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인데다가 마침 소설을 좀 같이 읽어보지 않겠느냐는 지인의 권유가 계기가 되어 가입하게 된 독서모임의 첫번째 미션이 이 책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미국의 신진 작가인데 알고보니 미국에선 꽤 많이 읽힌 소설. 반신반의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이틀 반만에 다 읽었다. 소설을 대하는 평소의 내 독서력을 넘어서는 결과는 온전히 이 소설의 짜임새 있는 플롯과 입체적인 캐릭터들 때문이었다. 


소설은 미국 오하이오주 세이커하이츠시를 배경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리처드슨씨의 일가와 그들이 소유한 또 다른 작은 가옥에 세들어 온 예술가 미아와 그녀의 딸 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 그리고 미아의 과거사가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소설 내내 이 두 가정을 중심으로 두개의 서로 다른 가치가 간섭하고 충돌한다. 도덕률 속에서 합리적 질서를 세운 미국의 중산층, 그들이 원하는 안온한 삶과 그 질서의 울타리 밖에 존재하는 주변부의 삶이 끊임없는 갈등을 만들어 낸다. 갈등의 불씨들은 곳곳에서 타오르다가 결국 삶 전체를 집어삼키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작가는 모든게 사라진 그 폐허 위에서 또 다른 가치의 가능성을 묻는다. 


"폐허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새로 시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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