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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l 14. 2018

이야기가 머물고, 지나가는 공간

영화 <더 테이블> 후기

사람과 사람이 만납니다. 조금 오래, 그리고 편안한 대화를 위해 안락한 의자가 놓이고 대화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따뜻한 음료나 약간의 다과가 곁들여집니다. 어라. 그러고보니 탁자가 하나 있으면 좋겠군. 앉을때 무릎 높이 정도의 탁자면 적당하겠어. 그리고 탁자 위에 꽃을 올려두면 더 좋을 것 같군. 사람과 음료와 소파, 그리고 탁자. 네 토막의 스토리를 위한 공간은 그렇게 꾸며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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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사람입니다.  대충 이렇습니다. 오래전 헤어진 남과 여, 한참 밀당중인 남과 여, 결혼식을 그럴듯하게 꾸며 줄 가짜 혼주 계약을 위해 만난 두 여자, 그리고 이제 막 헤어지기 위해 만난 남과 여.

이들은 차례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공간을 채웁니다. 주택가 골목이 보이는 큰 창을 통해 오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버티컬처럼 어둠이 내려옵니다. 스스로 관객을 자처하며 영화티켓을 구입한 우리들은 이 사람들이 쏟아내는 잔잔한 대화를 순차적으로 지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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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들은 사람들의 관계와 성격에 따라 다릅니다. 지금은 유명인이 된, 그래서 넘볼 수 없는 존재처럼 되어버린 옛 여자친구 앞에서 폼을 잡고 싶었던 회사원은 평일 점심시간이지만 맥주를 마십니다. 물론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여자는 에스프레소를 몇 모금 홀짝일 뿐이죠.

여자에게 찌라시의 진위를 확인하고 인증샷을 요청하는 남자는 찌질의 극을 달립니다. 세상엔 후회만 가득한 만남도 있는건가봅니다. 두 사람은 만나지 않는것이 더 좋았을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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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두 남녀는 달콤한 케잌과 두잔의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탐색전을 벌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우연하게 하룻밤을 같이 보낸 사이지만 별다른 통보없이 오랜 여행을 다녀 온 남자 때문인지 쉽게 서먹한 분위기를 넘지 못합니다.

계속되는 남자의 실언에 여자는 실망하지만, 먼 여행지에서 그녀를 위해 사온 자잘한 선물을 늘어놓는 남자에게 이내 마음을 열고 맙니다. 테이블을 벗어나 같이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은 쌉쌀하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 같은 사랑을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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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둔 여자는 사정상 가짜 혼주를 찾고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이되 가짜 사랑인 셈입니다. 여자는 엄마 역할을 맡아줄 중년의 여자에게 미리 짜여진 가족관계와 옛 추억담을 사무적으로 전달합니다. 그러나 가짜 엄마를 맡은 여자는 자신의 죽은 딸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두 사람은 크림으로 꽃무늬를 올린 따뜻한 라떼를 마십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무언가를 꾸미기 위해 만나는 중이군요. 중년의 여자는 설탕을 타고 결혼을 앞둔 여자는 설탕없이 잔을 듭니다.

꾸며진 결혼을 위해 만난 두 사람이지만 이들 사이에는 진짜 엄마와 딸 같은 묘한 정서적 교류가 생깁니다. 관객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때론 진짜 같은 가짜나 가짜 같은 진짜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거짓으로 새 삶을 시작하려는 그녀. 무언가 불안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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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테이블을 차지한 남녀는 좀 심각해 보입니다. 여자는 홀로 담배를 피우고 돌아와 아무일 없는 듯 따뜻한 홍차를 따라 마십니다. 남자는 다 식은 커피를 두고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성공한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 여자는 남자를 떠보듯 바람을 피우자고 제안합니다.  날 잡아달라는 뉘앙스로 미련을 보이기도 하죠. 여자는 "마음가는 길과 사람이 가는 길이 서로 다르다"며 아직 마음이 남은 것 처럼 말하지만 실은 현실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여자는 영악하니까요. 반면, 남자는 계속 흔들리지요. 여자와 잠자리를 갖고 싶지만 여자를 완전히 옆에 둘 자신은 없는 겁니다. 테이블이 놓여 있던 공간이 아마 그들에게는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 공간이 되겠지요.


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은 네가지의 흔치 않은 사랑이야기를 한 공간 안에서 풀어냅니다. 김종관 감독은 사랑의 경험이 많은 사람 같습니다. 그의 사랑 이야기는 약간 비현실적인 관계와 설정에도 불구하고 화면 밖에서 언제든 만날 것 같은 캐릭터들로 가상과 현실을 넘나듭니다. 게다가 여성의 심리를 묘사하는 디테일이 탁월합니다.

관객들은 타인의 이야기를 엿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시작하지만 이내 흘려 들을 수 없는 밀도 있는 대화에 흠뻑 빠져들고 맙니다 카메라는 자칫 단순하게 느낄수 밖에 없는 공간을  다양한 각도로 포착하고 머물고 클로즈업 합니다. 단순한 공간과 대사 중심의 전개는 얼핏 홍상수를 연상케 하지만 홍상수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감각적이고 시적인 영상미를 즐길 수 있습니다. 김종관의 전작 <최악의 하루>를 즐겁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료될 수 밖에 없는 영화.  그러나 이미 극장에서는 찾아 볼수 없는 영화 <더 테이블> 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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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테이블'(2017, 김종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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