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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체를 수습한 후

by 무너

어둠을 가르는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눈을 떴다. 놀라 뛰어나가보니 아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어두운 거실 한 쪽을 가르키고 있었다. 검고 반질반질한 껍데기와 긴 더듬이. 한 눈에 봐도 바퀴벌레였다. 녀석도 놀랐는지 걸음을 멈춘 채 느릿한 더듬이로 동태를 살핀다. 아내 옆에서 같이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차마 그럴수는 없었다. 일단 상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켜보자. 침대 머리맡에서 적당한 두께의 책을 찾아 녀석의 몸을 덮치듯 내리쳤다.

평화.

눈에서 벌레가 사라지자 아내도 잽싸게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바퀴와 아내가 동시에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 역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에 휩싸였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해체된 바퀴벌레의 사체를 수습하는게 얼마나 큰 고역인지 치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사체에서 삐져나온 눅진한 액체와 길고 검은 날개 따위를 닦아내고 나면 며칠을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작년 이맘때도 바퀴벌레 한 마리 때문에 며칠 밤을 설쳤는데 왜 길지 않은 인생에 이런류의 고통은 수없이 반복되는가.

바퀴벌레는 고작 내 엄지손가락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지만 무언가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공포와 마주하는 느낌이든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행성에 불시착해 이름모를 외계 생명체를 마주하게 된다면 비슷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일단 바퀴벌레는 잘 길들여진, 가죽을 연상케하는 맨질맨질한 껍질을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버둥거리는 다족과 긴 더듬이로 상황을 감지하고 순간 이동하듯 출몰을 반복한다. 느닷없이 일상을 침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매복해 있다가 또 모두가 방심할 때 기습한다. 도통 알수 없는 존재다.

일단 방으로 돌아와 마음을 진정시키며 사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궁리한다. 흡사 은밀하게 사체를 암매장해야 하는 연쇄살인마의 심정이 이런걸까. 대충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실행에 나선다.

1. 바퀴를 누르고 있는 책의 표지면을 한손으로 고정시킨 채 책을 들어올려 표지를 분리한다.


2. 일단 표지만 찢겨진 책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 (그러나 여전히 바퀴벌레의 사체는 책표지 아래 있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게 얼마나 큰 위안인가)


3. 목장갑을 끼고 그 위에 비닐 장갑을 착용한다.


4. 무언가를 잡아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도록 두루마리 휴지를 최대한 두툼하게 뭉친다.


5. 가급적 벌레의 사체가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도록 책표지를 밖에서 안으로 뭉쳐나간다.


6. 미리 준비한 비닐봉투에 구겨진 종이를 넣고 바닥에 눅진하게 남아있는 벌레의 잔해를 닦아낸다.


7.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미세한 잔해를 청소기로 빨아들인다.

소름끼치는 현실이다. 정리를 끝낸 후 장갑을 비닐봉지에 밀봉해 밖에 내버렸다. 손은 열번도 더 씻어냈다. 표지만 떨어져나간 책은 하필 며칠 안에 써야하는 글에 가장 중요한 참고도서다. 청소기 역시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흔적은 없어졌다지만 끔찍한 기억은 남았다. 다시 책과 청소기를 쓸수 없을것 같다.

책은 모 기관에서 발행한 비매품이라 다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소기는 어쩐다. 먼지필터를 갈아끼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용기 있는 자라면 얼마든 먼지필터를 털어내고 새것처럼 쓸수 있으리. 구입가 십육만원. 6개월 사용. 삼성제품이다. 먼지필터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바퀴벌레 잔해 약간량 포함. 십만원에 내놓는다. DM으로 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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