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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l 14. 2018

국가의 부재, 무장한 개인

<영화 'Three Billboards'(마틴 맥도나 감독,2017)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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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대립구도가 명확할 때 사람들은 주로 피해를 입은 약자나 약자를 돕는 영웅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꼬인 실마리가 풀리고 약자가 피해를 회복해가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쾌감을 느낀다.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부분의 할리우드나 범죄 스릴러가 그렇고 80년대를 풍미하던 홍콩영화 역시 이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한때 난립하던 국내 조폭영화마저도 이런 대립구도 안에서 누가 더 정당한지 또는 도덕적 우위를 갖는지에 따라 선과 악이 갈리곤 했다. 그러니까 선악의 구도야 말로 신화로부터 시작되어 소설과 영화를 거치며 인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모든 스토리의 기본인 셈이다.

그러나 피해와 가해가 상호적이고 딱히 약자와 강자라고 구분할 수 없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관객들은 또 다른 의미의 쾌감을 느낀다.

그 쾌감은 영화 속의 복합다단한 상황속에서 흔들리고 갈등하는 배역들에게서 느끼는 동질감이다. 상상속의 명쾌한 복수극이 슬슬 지루하게 느껴지게 된 건 범람하는 클리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시민들의 겪는 영화같은 현실이 더 극적이기 때문 아닐까.

오늘 본 영화 <Three Billboards>가 그렇다. 영화속 캐릭터들은 대부분 별 볼일없는 약자들이지만 서로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는다. 잔악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과 편견에 가득차 있는 무능한 경찰의 갈등을 기본 축으로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무능한 백인 경찰관과 동성애자, 장애인, 흑인의 갈등이 덧입혀진다.

이들이 살아가는 작은 마을은 무장한 개인이 복수와 복수를 주고받는 사회다. 이를테면, 국가가 형해화된 공간이라고 할까. 그 공간 안에서 젠더의 문제, 인종의 문제, 약자와 소수자의 문제가 얽히면서 사람들은 개인의 무장만으로는 직면한 공포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지극히 미국적인 상황의 설정이지만 국가의 부재 안에서 유일한 대안은 사회, 그러니까 개인의 자발적 연대라는 자각만큼은 보편적이다.

영화의 말미에 두 주인공이 아이다호를 향해 떠나는 장면에서 이질적인 두 존재의 화해와 연대는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시키면서도 또 다른 시대적 요구와 지향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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