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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l 14. 2018

시, 물 위에 쓰여진 언어

영화 <패터슨> (짐 자무쉬) 후기

지금은 깜빡이는 커서를 한 칸씩 뒤로 밀어내며 글을 쓰고 있지만 스무살 즈음엔 수첩이나 메모지 같은데 글을 썼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를 썼던건데 그 때의 습작들이 표현과 문장을 만들어가는 재미를 알게 해주었던 것 같다. 잘 쓰지 못했기 때문에 더 매달렸다고 할까. 틈 나는대로 기성의 시를 흉내내 습작을 했는데 닥터나 엔지니어가 되길 원하셨던 부모님은 나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늘 혀를 끌끌 차곤 하셨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꽤나 어두운 기억만 남은 시절이지만 습작에 몰두하던 그 순간 순간 만큼은 지금도 창고속 색바랜 원고지 뭉치처럼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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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은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준 영화다.

반복되는 일상의 공허함을 자기만의 시어로 촘촘하게 메꿔가는 '패터슨 마을'의 버스운전기사 '패터슨'은 진중하고 또 섬세하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지만 그윽한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동료의 하소연을 경청한다. 길에서 만난 소녀의 시를 암송하고 랩 연습을 하는 흑인청년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원형 패턴에 집착하는 아내에게 "무늬가 서로 달라서 좋다'고 칭찬하는 그는 단조로움 속에서도 항상 의미를 발견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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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평범한 언어의 실로 빛나는 의미를 직조해내는 사람,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이미지를 포개어 또 다른 이미지를 그려내는 사람, 물음표 모양의 낚시바늘로 관계의 의미를 낚는 사람일테니 패터슨이 아무리 스스로 "버스운전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감추어도 시인이라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출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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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어느 노동자의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그 반복과 변주 사이에서  '시'라는 예술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시는 형태로 존재하는 예술이 아니라 때론 형태로 존재하지 않아 더욱 빛나는 무형의 예술이다. 비록 강아지 때문에 산산이 흩어진 습작노트를 복기하지 못하지만, 어차피 시는 '물 위에 쓰여진 언어'일 터, 오히려  '텅빈 페이지는 더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는 사실을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새로운 시를 쓸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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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과 같은 무명의 시인들에겐 특별히, 시인을 꿈꾸지 않더라도 좌절을 딛고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힘이 되어 줄것 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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