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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l 15. 2018

'신'의 정의는 정의로운가

영화 <킬링 디어(요르고스 란티모스, 2017> 후기

"신은 완전하다. 완전성은 존재함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중세 신학자 안젤므스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논법이다. 신이 완전한지 완전하지 않은지 먼저 규명되어야 할 문제지만, 완전하지 않다면 신이라 할수 있을까 싶긴 하다.   


영화 <킬링 디어>는 '완전한 신'과 '불완전한 인간들'의 대결구도를 그린다. 물론 답이 정해진 탓에 스토리가 주는 재미는 적다. 대신 극도의 불편함이 공포로 이어지면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시도 눈을 돌릴 수 없다. 종교적 영화인 탓에 은유와 상징이 가득하다. 소위 평론가로 알려진 몇몇 지식인들에게 호평을 받을 영화다. 


영화 속에서 심장 전문 외과의사 스티븐(콜린 파렐)을 신(마틴, 배리 케오간)과 인간계를 잇는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평론가는 영화를 소비하는 대중들에게 전지전능한 감독(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뜻을 해석해주는 제사장인 셈이다. 영화를 보신분은 알겠지만, 인간은 언제든 명확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유명하다는 평론가들에게 너무 휘둘릴 이유는 없다.  

스티븐의 아내 애나(니콜 키드만)가 남편을 유혹하거나 남편에게 속죄할 때의 행동이 잊혀지지 않는다. 옷을 벗고 침대의 가로 방향으로 반듯하게 눕는다. 제단위의 제물을 연상케 하는 행동이다. 스티븐은 여러 의미에서 신의 지위를 넘보는 인간(제사장)이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도 완벽한 가장이다. 사람의 생명(심장)을 좌우하는 외과의사이며, 가정이라는 질서를 세우고 아내와 자녀를 통솔하려든다. (가부장의 질서가 다 그렇지만) 가사 분담을 지시하거나 아들의 머리스타일을 간섭하는 식이다. 


위기상황이 되면 모두를 구원하려하지 않고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선택하고 징벌한다. 마지막 처형 장면은 스스로 신의 집행관을 자처한 인간의 한계와 어리석음을 상징한다. 애매하면 운명에 맡기는 거지 뭐. 될대로 되라. 제물이 되면 순교자로 추앙되고, 운이 좋아 살아남아도 회개하는 흉내를 내면 되니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없다. 모든건 신이 정한 운명이고, 인간은 앞을 내다볼 수 없기에 무릎 꿇고 순종해야 하는 존재. 그게 종교가 만들어낸 위계의 구도 아닌가. 


가족 중 한명이 죽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자 온 가족이 스티븐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딸은 "생명을 준 자가 아버지니 아버지만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며 순교를 자처하고, 아들은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 속죄하고, 아내는 남편이 좋아하는 블랙 드레스를 입고 종말을 기다린다. 

스티븐을 쫒아다니던 마틴(배리 케오간)은 어리숙한 학생으로 나오지만, 등장부터 범상치 않다. 무슨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스티븐은 마틴의 말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닌다. 마틴에게 시계를 선물하고(감히 신에게 인간의 규칙을 강요하다니)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베푼다. 


그러나 마틴의 관심사는 오로지 불행의 균형을 맞추어 '세상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 뿐이다. 미래를 예지하고 사람들을 이간하며 용서하기 보다 질투하고, 복수하는 '신'의 속성을 다 가졌다. 그는 징벌이 끝난 후에도 스티븐의 가족을 주시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던 불편함은 어쩌면 종교(신)가 말하는 '정의'에 대한 회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틴(신)이 말하는 정의는 과연 정의로운가." 감독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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