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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Nov 13. 2018

뭣도 아닌 그대들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에 대한 답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지 말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계급을 자기 자신의 정체성으로 착각하곤 한다. 입만 열면, 회장이고 대표고 전무고 이사고, 위원장이고 장관이고 기자고 검사며 판사다. 한자리 안하는 사람 없고 완장 안찬 사람도 없다. 그렇게 자신의 외피를 자기 자신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과격하게 어깨를 부딪히며 산다. 쫄리면 뒤지시든지.


원체 세상의 문법이 그런지라 요즘들어 부쩍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묻는 분들이 늘고 있다. 과연 자기 자신 외에 "내가 누구인지"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의문이지만, 이 분들은 미리 명함을 주거나 수인사를 나누는 식의 통상적인 절차들을 화끈하게 생략하는 상남자들이라 상대의 당혹감은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얼굴을 보자마자 주관식으로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질문을 던진 후 상대편이 즉각 정답을 말하지 못하면 화를 내거나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니.. 내 누군지 아나? 마 느그서장 남천동 살제? 으잉?! 내가 인마 느그 서장이랑 인마! 어저께도! 같이 밥 묵고 으! 싸우나도 같이 가고 으! 마 개이 섀꺄 마 다했어!

영화적 과장이 포함되었을지 몰라도 이 화끈한 상남자들의 말투나 행동은 너무나 천편일률적이어서 어디서 단체 합숙 훈련이라도 받은것 아닌가 오해할 정도다. 그 많은 인원을 단체 합숙훈련 시킬수 있는 시설은 국내에 없을 뿐 아니라(혹시 군대인가) 설령 시설이 있어 단체 훈련을 한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향해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며 멱살을 잡을 경우 걷잡을 수없는 혼란에 빠질수밖에 없기에 집체교육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 견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자리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통되는 무슨 교본이라도 있는게 아닌가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다.  


과거 언론보도를 뒤져보면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개망신한 사례를 수천개 발견할 수 있겠지만, 요 며칠 사이에만 세개나 눈에 띠는 것은 아무래도 좀 이색적이어서 이 분들이 각자 전수받고 훈련한 결과를 경쟁적으로 펼쳐보임으로써 소속감과 동질감을 강화하려는 술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전에는 구청공무원이 경찰관에게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 화제가 되었고, 이틀 뒤에는 청와대 경호원이 또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경찰관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다가 직위해제가 되었으며 하루 뒤 어느 유도선수 역시 경찰관에게 같은 주관식 질문을 내고 체포가 되었다나. 아. 좀 몇명은 객관식으로 내지 그러냐. 경찰관들 대부분 객관식으로 취직한 사람들이거든. 주관식 과목 몇개 없어, 이 응용력 떨어지는 것들아.


 "인간은 자꾸 누구인지 말해야 하는 순간에 무엇인지를 말하고 싶어한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란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산다. 어느 날 맨몸뚱아리로 세상에 던져진 자기 자신의 근원과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과 성찰이 필요한데 이러한 과정 없이 살다보니 자기가 하고 있는 사회적 역할을 '자신'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명함에 새겨진 수식어를 마치 자기 자신인양 믿으며 살다가, 어느 순간 그 수식어가 떨어져 나갈 때 멘붕에 빠지는 것이다. 한 번도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해보지 않은 것들이 완장차고 행세하다가 완장 떨어지는 날 발견한 초라한 자아를 받아들이지 못해 좌절하는 사례 주변에서 흔히 보지 않았나.


그런 비극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타인에게 던지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게 가장 중요한 노후대비라서 그렇다. 질문을 곰곰히 되새기며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다보면 '무엇'이 아닐 때의 자신이 비로소 '누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는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무엇'이었을 뿐, 홀로 있을 때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뭣도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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