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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Mar 31. 2019

품격을 위해 존엄함을 놓친 영화

영화 <그린북(Green Book , 2018, 피터 패럴리)> 후기 

약자인 셜리가, 차별과 혐오를 속으로 인내하고 견뎌내는 캐릭터로 묘사되는 이 영화가 영화로서의 품격은 지켰을지 몰라도 존엄함은 놓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셜리가 자신의 존엄을 위해 핏대를 세우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셜리에게 감정이입을 했을 것이다. 물론 실존인물인 돈 셜리의 잘못은 아니다. 그를 수동적인 인간으로만 묘사한 영화의 문제일 뿐. 

반전평화운동과 공민권운동이 확산되던 60년대 미국,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남부지역(deep south)으로 순회공연을 떠나며 이탈리아에서 이주해 온, 백인 토니 발레롱가를 운전기사로 채용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공연기획사 측에서 운전기사인 토니에게 준 책자의 제목은 <그린 북>. 유색인종이 노골적인 테러와 조롱을 피해 안락하게 여행하기 위한 노하우와 유색인 전용 숙박업소 등을 소개한 책이다. 

그린북, 흑인들이 안전하게 식사하고 쉴수 있는 호텔 등을 안내하던 책자


겉으로 보기에도 흑백의 역할이 전도된 상황인데 주인공들의 성격과 취향도 통념을 뒤집는다. 흑인 셜리는 고급스러운 취향에 바른 생활 사나인데 반해 백인 토니는 래퍼처럼 막말과 허풍을 쏟아내는 근육질의 사내다. 
전혀 어울리지 못할 것 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계층과 인종을 넘어 우정을 쌓는다. 상반된 캐릭터는 갈등의 잠재요인, 이들이 겪는 여러 사건들은 갈등의 점화요인이다. 두 달간의 순회공연은 갈등을 공존으로 끌고 가는 변화의 여정이며 영화의 골격이다. 


통념을 뒤집는 설정이나 차별과 폭력의 에피소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성장해가는 두 사람의 변화 모두 인종주의를 다룬 영화의 전형적인 문법을 따라간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그린 북>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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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놀라운 건 영화를 보며 나도 모르게 백인 토니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토니는 무식하고 폭력적인 성격이지만 고비마다 자신의 고용인 돈 셜리를 구해주는 해결자적 존재다. 영화의 시선, 즉 카메라는 관객들에게 주인공과의 동일시선을 유도하는 기제로 작동한다고 했던가. 나는 셜리보다 토니의 시선에 스스로를 대입했다. (흑인펍에서 현란한 재즈연주를 하는 셜리를 바라보며 흐뭇한 마음으로 박수치는 건 토니인 것 같지만 사실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다. 이는 영화를 만든 사람의 인종적 위계가 드러나는 장면인 동시에 영화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의 인종적 위계를 깨달을 수 있는 장면이다.) 


셜리는 부유하고 학식있으며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진 사람이지만 본질적인 지점에 이르렀을 때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무대위에서는 백인귀족들의 기호를 충족시켜주는 '사람'으로 대접받지만 무대 아래에서는 실내 화장실 사용이 금지되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없으며 번번이 경찰에게 검문을 당하는 '검둥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셜리는 저항하지 않고 분노를 억누른다. 최대한 참고 억누르다 마음을 열어주는 사람 앞에서만 눈물을 흘린다.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용인되는 영역 안에서만 감정을 표출하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그려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이 우월적 존재이자 시혜적 존재이며 해결자적 존재로 동일시 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혐오와 소수자를 대하는 위선적 방식이 꼭 할리우드 영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해 각종 단체에서 '올해의 인권도서'로 추천된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보면 이런 장면이 소개된다. 장애를 가진 필자의 학창시절 그는 월 10만원 정도의 장학금을 지원 받았다는 이유로 모 국회의원이 주관하는 행사에 초청된다. 필자와 같은 수혜자를 빼고 초청된 사람은 대부분 장학기금에 기부한 사람들. 고급스러운 홀에서 식사를 하면서 초청된 사람들이 "천사같은 (장애)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희망이 되어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따위의 소감을 발표하는 동안 필자에겐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그 자리를 이렇게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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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전시되었다. 그들의 모임에서 나는 일종의 가판이었다. 그들이 모임을 유지하면서 가꿔온 화초같은 존재였다... 나는 위안이요, 뿌듯함이요, 그들의 삶을 정화시켜주는 화초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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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김원영의 저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우리는 흔히 소수자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배운다. 보호는 힘이 있는 사람만이, 또는 힘이 있는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는 관계의 방식이다. 그러나 보호도 존재의 존엄함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군가 보호를 명목으로 구경꺼리로 만들거나 자기만족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존엄함을 훼손당할 뿐이다. 자신들의 품격을 위해 타인의 존엄함을 훼손하는 방식의 관계맺음을 '보호'로 보긴 어렵지 않을까.


셜리가 존엄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 분노하고 저항했어야 했다. 감옥에 갇혀있을 때 백인 유력정치인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받을 것이 아니라 갇힌 이유를 해명해달라고 철장을 두드리고 큰 소리로 부당함을 주장했어야 했다. 물론 약자의 언어가 통할 사회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그게 먼저다.


약자인 셜리가, 차별과 혐오를 속으로 인내하고 견뎌내는 캐릭터로 묘사되는 이 영화가 영화로서의 품격은 지켰을지 몰라도 존엄함은 놓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셜리가 자신의 존엄을 위해 핏대를 세우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셜리에게 감정이입을 했을 것이다. 물론 실존인물인 돈 셜리의 잘못은 아니다. 그를 수동적인 인간으로만 묘사한 영화의 문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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