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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Apr 21. 2016

뚝심있는 그녀

<영화 '귀주이야기' (1992) 후기>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끝날 일이었다. 추쥐에겐 이백오십원의 돈 보다는 미안하다는 말이 더 중요했다. 아무리 촌장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낭심을 차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암탉이나 키우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는 이유로 촌장은 남편의 낭심을 발로 걷어차 놓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놈의 체면 때문이다. 딸만 줄줄이 낳은 것도 서러운데 이제 막 장가를 간 풋내기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은 것이 괘씸하다.

배에 들어있는 아이가 딸이면 이제 남자구실 못하는 남편과 어떻게 아들을 낳나 걱정이 가득한 시골 아낙 추쥐는 만삭의 배를 움켜잡고 소송에 나선다. 촌과 현의 공안국을 거쳐 시공안국에서도 원하는 결과 대신 기껏 250원의 치료비를 지급하라는 조정결정만 반복되자 정식 형사고소에 이른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산통을 하게 되는 추쥐. 그러나 애꿎게도 마을에는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촌장 뿐이다. 촌장의 도움으로 겨우 아들을 얻은 추쥐와 그녀의 남편은 비로소 촌장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애쓴다.

아이의 백일이 되어 온 마을 사람을 초청한 자리에 촌장은 늦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촌장을 기다리던 추쥐는 촌장이 자신의 고소로 인해 15일 구류처분을 받고 체포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시내로 향해 난 신작로를 따라 급히 달려가는 추쥐. 그리고 황망한 그녀의 표정을 잡는 카메라.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영화 <귀주 이야기>는 개혁개방이 불어닥친 90년대 중국 남서부 귀주성의 어느 산골에 사는 추쥐라는 시골 아낙의 소송 도전기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들의 복장만 보고 60년대 배경인가 했다가 뒤늦게 영화에 터미네이터와 주윤발 영화포스터가 나오는 걸 보고서야 알았다. )

추쥐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순박하고 때묻지 않았다. 체면을 소중하게 여기고 돈보다는 대의명분을 아끼는 유교적 정서를 지니고 있다. 반면, 추쥐가 소송을 위해 처음 찾아간 도시는 화려하면서도 어수선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공간은 이렇게 도시와 농촌 두개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전통과 변화의 중간쯤에서 무얼 어찌해야 할까 몰라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엔딩장면의 추쥐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중국의 변화가 시작된 시기의 농촌과 도시 모습을 훗날 이 영화를 통해 생생하게 알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영화는 사실적이다.

짤방은 도시를 처음 찾은 추쥐가 인력거꾼에게 사기를 당한 후 시골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새옷을 사입은 모습이다. 공리의 사실적인 캐릭터 몰입에 빵터져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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