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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Apr 21. 2016

현재는 진행중인 과거다.

유재현 /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 그린비 출판 / 후기 

#1.
역사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기억은커녕 등장인물의 이름을 익히는 것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등장인물은 얼마나 많은가. 세세한 사건들과 연도를 기억하는 것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런 이유로 학생 꼬리표를 떼고 난 후 역사서는 내 관심영역의 밖으로 밀려났다. 서양사나 우리 역사나 고등학교 때 외웠던 것으로 그럭저럭 때울 수 있었기 때문에 딱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역사서는 내 취향이 아니다.


#2. 
역사서인지 르포르타주인지 모르겠다. 두 번째 글까지는 르포의 느낌이 강한데 ‘1945년의 베트남을 말한다’부터는 다르다. 제목 또한 역사와 르포가 섞여있다. ‘기억’은 과거의 영역인데‘걷다’라는 현재형 동사가 바로 뒤를 잇는다. ‘기억’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주관적 기술을, ‘걷다’는 르포를 써내려가는 작가의 자세를 드러낸다. 역사를 기술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본인의 주관에 따라 재구성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어쨌거나 따분한 역사책임은 분명하다. 얼마나 재미가 없으면 나온지 칠년인데 아직 2쇄 찍었을까.  


#3. 
그래도 이 책은 역사서보다 르포르타주의 성격을 갖는 부분이 많다. 지루한 부분도 많았지만 그런 요소들 때문에 그래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을 법한 현상들과 그 이면의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는 재미는 복잡한 시대정세와 더 복잡한 등장인물로 인해 반감된 흥미를 상쇄한다. 타일랜드의 섹스관광이나 킬링필드에 가려진 역사적 사실들, 골든 트라이앵글의 배경 등은 단편적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때론 따분하지 않은 역사책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4. 
조지오웰은 자신의 소설 ‘1984’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 속에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래는 ‘누적된 현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과거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는 현 시점에서 특정인 혹은 특정 사건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찰라의 현재들이 스쳐지나가며 기억의 저장소에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모든 과거가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록되는 과거가 있고 기억조차 되지 않는 과거가 있으며 어떤 과거는 의도적으로 잘못 기억되고 기록되기도 한다. 권력자들이 과거를 지배하려 드는 건 그 권력을 영속화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잘못된 과거의 기억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바로 세우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렇게 느꼈다.


#5. 
사실 글을 읽어가면서 적지 않게 불편했다. 62년생, 80년대 학번, 사회운동 경력과 ‘창작과 비평’을 통한 등단 이력 등으로 보아 그는 영락없는 386 지식인이다. 우리사회를 철지난 사회주의 이념으로 들끓게 했던 세대가 아닌가. 악에 저항하며 그 악을 닮아갔던 세대가 아닌가. 타일랜드의 섹스기지화의 배경과 동두천의 양공주가 겹치면서 그런 혼란은 더해졌다. 캄보디아의 대학살 이면에 있었던 역사적 배경을 읽으며 내가 불편한 기분을 느낀 것은 그의 말대로 이념적 오리엔탈리즘 때문일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들의 민낯을 들켰기 때문일까.


#6. 
아시아는 비극적인 대륙이다. 가장 먼저 문명을 누렸고, 가장 큰 종교의 창시자들이 태어났고 가장 많은 인구를 가졌지만 근현대 내내 제국주의와 이념의 전쟁터로 파헤쳐졌던 대륙이다. 그럼에도 아시아는 세계의 중심권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우리는 틈만 나면 그 곳으로 여행을 떠나지만 한 번도 심각하게 아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시아는 저렴한 가격에 이국적인 기분을, 마사지와 휴양을 제공해주는 유흥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 곳에도 우리의 5.18같은, 우리의 6.25같은 상처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7. 
책에 소개된 아시아 국가들의 역사는 한국의 근대사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읽는 내내 약간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연민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우리의 근대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세의 침입과 제국주의의 지배, 수탈과 억압, 이념적 갈등과 정치적 혼란, 전쟁과 살육. 독재와 항쟁이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히 얽혀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시아의 현실을 공감하지 못한다. (필리핀의 한국전 파병과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과 같이)생존을 위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과거의 경험은 형제애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의 비극은 진행형이다.


#8. 
읽다보니 하나의 배후가 뚜렷이 보였다. 미국이다. 배후는 강한 무력을 휘두르지만 세계평화라는 선한 외피를 쓰고 있다. 배후는 작가가 파헤치려하는 비극의 기원이기도 하다. 미국은 킬링필드의 서막을 연 장본인이기도 하고 전쟁을 위해 태국과 일본에 섹스기지를 만들기도 했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아시아의 땅에 아편생산의 산지를 조성한 주범이기도 하다. 이 책에 나온 대로라면 근대 아시아의‘악의 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미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뒤늦은 질타와 분노를 부추기는 것으로 우리의 손바닥만 한 양심을 건사하면 그것으로 끝인 걸까.


#9. 
과거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변화무쌍한 해석의 근거다. 아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계화의 물결에 몸을 맡긴 우리는 어쩌면 과거왜곡의 공범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내가 보지 않았던 역사의 이면을 보여주었다. 사실 사회주의적 사관도 제국주의적 사관도 달의 다른 한 면을 고의적으로 보지 않으려 하는 점에서 마찬가지 아닐까. 누가 말해도 그게 전체가 아닌 것만은 확실할 테니.


#10. 
어쨌거나 현재는 진행 중인 과거다. 그것이 이 책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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