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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Oct 14. 2019

차별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필독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2018)> 후기

'상식'은 선량한 시민 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를 말한다. 동시대, 같은 문화권 내에서 형성된 사고의 교집합이랄까. '상식'은 법이나 제도로 이어져 현실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관습이나 도덕과 같은 이름으로 일상을 구속하기도 한다. '지식인'이라는 말에서 시대를 리드해야 하는 사명이 읽힌다면 '상식인'이라는 말에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의 최저 지점이 보인다.


예를 들어 "차별받지 않는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만듭시다."라는 구호가 있다 치자. 정치적 슬로건이어도 좋고 특정 기관의 홍보문구여도 상관없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복문이다.


(1)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듭시다. 

(2) 정의로운 사회를 만듭시다. 

(3) 공평한 사회를 만듭시다.


자, 이 문장을 '상식'의 범주에서 판단한다면 어떤가. 당신의 '상식'을 기준으로 이 세 문장이 가지는 당위를 부정할 수 있을까. 요컨대 '차별'은 이미 보편적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가 된지 오래다. '공평한 세상'은 모든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정의의 기준이 되었다.


그렇다면 모두가 선량한 상식인을 자처하는 우리 사회에서 ‘차별금지’는 보편적 상식의 지위를 획득했을까? 정말 우리 사회에는, 우리 직장에는 차별이 없을까?


김지혜 교수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선량한 사람들, 보편적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도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니. 형용모순 같은 책의 제목을 보고 처음엔 의도적인 역설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차별이 어떠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현상인지, 왜 평범한 사람들이 차별에 동조하고 차별을 주도하는지 깨달았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의와 공정의 잣대 위에 올려두고 세상을 바라본다. 때론 다수의 시선에 기대어 소수자를 평가하고 재단한다. 자신의 특권이 흔들리기 전까지 특권 위에서 자라난 상식은 그렇게 자기방어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자신의 특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고 “우리는 한 곳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더 이상 주류가 아닌 환경에 놓일 때에만 사람들은 차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외국에 나가 졸지에 ‘유색인’이 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의 입장이 되어볼 수 없는 것처럼 평생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있다. 이렇게 유추조차 어려운 상황에 대한 몰이해는 편견을 심화시킨다. 이런 경우 평등은 ‘제로섬 게임’이 되어버리고 ‘상대의 이익’과 ‘나의 손실’이 직결되는 맥락 안에서 차별의 문제는 긍정적 사회변혁의 동력이 아니라 파괴적 사회갈등의 요인으로 변질된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기울어진 운동장의 어느 지점인지 깨닫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식’의 외피를 쓴 편견이 갈등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문제를 야기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난의 의도가 없었다.”는 말로 차별적 표현을 합리화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차별의 근거가 되는 다수와 소수, 우리와 타인을 구분하는 경계역시 모호하다. 예를 들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남자 아이스하키 팀의 구성원으로 뛰었던 7명의 귀화선수들에게 “우리”라는 타이틀을 내어준 사람들과 어린이집에 외국인 아동의 입소를 거부한 학부모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이러한 이중성의 이면에는 ‘공익’과 ‘질서’같은 개념들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한 시대를 대표하던 ‘공익’과 ‘질서’가 다음 세대에서 ‘야만’과 ‘몰상식’이 되는 사례(가장 쉬운 예로 공민권 운동 이전의 미국과 남아공의 분리주의 정책을 생각해보자)는 얼마든지 있었고, 우리는 그런 변화의 과정을 ‘역사적 진보’라고 부른다. 당신이 차별 없는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상식이나 법이라고 불리는 규범체계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할 이유다.


이 책은 도처에 널린 차별의 지점들을 일깨워준다. ‘결정장애’라는 단어가 ‘장애’라는 신체적․정신적 상태를 열등한 것으로 고착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고, 문화의 다양성과 상호존중의 의미로 사용해야 할 ‘다문화’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어버리는 부조화를 예리하게 집어낸다.


이 책은 말미에 차별을 넘어서는 적극적 방법으로 몇 가지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한 구체적 대안보다 그 대안을 도출하기까지의 전개가 흥미롭다. 롤스의 ‘시민불복종’과 밀의 ‘자유론’ 같은 계몽시대의 주장들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할 것이다. 더 자세하게 쓰면 안 읽으실 것 같아 여기서 멈춘다. 차별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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