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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Oct 20. 2019

‘아비없는 두 세대’를 잇는 공감대

영화 <벌새> 후기

<벌새>는 하나의 사회적 이슈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어떤 시대에도 있었을 법한 조용하고 맑은 아이의 시선으로 한 시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 풍경에는 가정폭력이 대물림되는 부권적 사회환경, 차별과 학벌주의를 심화시키는 교육,  개발시대의 폭력적 분위기와 그 시대를 견딜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단한 표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딸을 키워본 적도 없고 폭력을 견디며 살아본 적도 없어서 그런지 영화 <벌새>의 은희가 겪어내는 일상의 풍경들을 보며 놀랐다. 오빠에게 맞고 자란 여성들이 그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가부장은 가정 내에서 위계를 정하고 폭력을 내면화시키는 기저인 동시에 밖으로 국가폭력 구조를 작동시키는 최소단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가 겪는 폭력은 보호자들에게 조차 남매간의 소소한 다툼으로 인식되기에 어디에서도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일상화된 폭력을 은희 혼자 감내해야 한다. 집은 그녀에게 안락한 공간이 아니다. 학교는 학교대로 차별과 폭력이 구조화되어 있다.

마음 붙일 곳 없는 은희는 내내 떠돌아다닌다. 남자친구를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래의 여자후배와 마음을 주고 받지만 그 또한 위로가 되어주지 않는다. 한문선생님 영지만이 은희에게 눈을 맞춰주고 어깨를 내어주는 어른이다. (감독은 은희와 영지의 두 캐릭터를 통해 성장기의 자아와 어른이 된 자아를 드러낸다.) 그러나 삶의 터전을 잃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개발사회의 한 모퉁이에서 은희는 영지마저 뺴앗긴다.
     
영화는 내내 은희의 마음을 읽어주지 않는(더 나아가 읽는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보여주지만 은희는 단단한 내면의 자아를 키워낸다. 존재감도 없고 허당처럼 보이지만 차 한잔이라도 대접을 받으면 고마운 마음을 누르지 못하여 또박또박 손글씨를 눌러 답례 편지를 쓰는, 은희는 그런 아이다. (은희가 글씨를 쓸 때마다 자기 이름자 뒤에 마침표를 꼭 눌러 찍는 야무진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눈물이 날뻔했다.)

영화 <벌새>는 <유열의 음악앨범>과 같이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유열의 음악앨범>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을 내세워 추억을 소환한다면 <벌새>는 같은 해 발생한 성수대교 사건을 통해 동시대의 상처를 위무한다. 세월호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 세대에게 20년전의 상처를 보여주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권위만 있고 책임은 지지 않았던 '아비의 부재'는 세대를 넘는 상처의 공감대가 될수 있을까. <벌새>는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우리 세대의 아픔을 조용히 일러주며 눈을 맞추는 그런 영화다.

영화 <벌새>후기
#영화 #무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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