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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Nov 04. 2019

스무살 아들과 같이 본 82년생 김지영

영화 <82년생 김지영 후기>

"그거 페미니즘 영화잖아."

조조영화(82년생 김지영)를 같이 가겠냐는 질문에 돌아오는 답이 마땅치 않게 느껴졌다.

"페미니즘이 뭔데? 그게 왜?"

"여성 우월주의 아냐? 잘 모르지만 엄청 욕먹는 영화를 뭐하러 봐."

"아니다.. 너 무조건 봐야겠다. 내일 여덟시에 깨울테니 일어나. 영화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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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들과 영화를 봤다. 보는 내내 답답했다. 소설로 읽었을 때는 다 아는 이야기(여성차별과 혐오의 쟁점들)를 나열해 놓은 레포트를 보듯 동요없이 술술 읽어내려갔는데 영화는 달랐다. 목구멍 언저리를 맴도는 말을 시원하게 다 쏟아내지 못하고 나온 기분이었다. 아들은 원래 생각을 많이 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고 한발 물러서면서도 남자 주인공(공유)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공유라니. 꿈이 야무진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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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인공 지영은 가끔 다른 사람이 되어 말한다. 그런 지영의 '빙의'는 '정신질환'으로 평가받고 치료의 대상이 되지만 사실 그녀가 다른 사람에 빙의되어 내뱉는 말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꼭 필요한 항변들이다. 어쩌면 '말'을 '한다'기 보다 '간신히 내뱉는다'는 느낌이 더 어울릴 것 같이 간절해 보였다고 할까. 수백년은 묵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만큼 억눌렸던 말들이 겨우 다른 사람의 말로 터져나오다니. 영화 속 지영은 온 시대의 모순을 견뎌내고 또 대변하는 "빈껍데기"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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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겨우 할 "말"을 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환자 취급을 받지만, 환자취급 받는게 꼭 지영뿐일까. 할 "말"을 하는 모든 여성들이 환자취급 받는게 현실 아닐까. 영화의 말미에 가서야 지영은 스스로의 목소리로 "맘충"운운하는 남성들에게 할 "말"을 하지만 그 장면조차 고구마 두어개를 입에 문듯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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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그나마 가장 속 시원했던 장면은 지영의 엄마가 남편이 아들주려고 사온 흑염소를 내팽겨치는 장면과 취업시험에 자꾸 실패해 풀이죽은 지영에게 "더 나대라"며 응원하는 장면이었다. 성장과정에서 차별에 의한 상처를 가진, 그래서 지영을 온전히 이해하는 존재, 엄마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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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이 외할머니에 빙의되어 자신의 엄마를 위로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었다. '여성'이 가지는 한계, 지영이 말하는 "어디 갇힌 것 같은" 기분은 삼대가 지나도록(아니 수백년간) 달라지지 않는 냉혹한 현실임을 일깨워주는 장면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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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 몇몇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가 재미있다. 이들 캐릭터는 우리사회의 성평등 수준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래도 괜찮은 남자는 지영의 남편 대현(공유)과 누나들 사이에서 잘 자란 남동생(김성철) 정도다. 대현은 공감능력이 살아있고 처해진 상황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무척 우유부단하다. 착한 남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 같았다.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성인지 감수성이 괜찮다고 하는 남자들이 이정도 아닐까. 나 역시 이정도 수준이나 될지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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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남성들은 암담했다. 커피를 쏟은 지영에게 "맘충"거리는 카페손님과, 미친여자는 격리해야 한다는 대현의 동료사원, 여사원의 화장실 몰카를 돌려보는 오과장에 비하면 취업걱정하는 딸에게 "시집이나 가라"고 역성을 내는 아빠와 할머니 손에 큰 아이는 결핍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악담을 하는 '이사님'은 애교수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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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중에서 가장 쿨하게 보이는 "김팀장"도 남성중심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깨우친 여성에 불과하다. 그녀는 모욕적인 말을 하는 이사를 향해 당차게 쏘아붙이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남성(권력자)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현실과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남성만으로 프로젝트팀을 구성하는 등)하는 여자다. 조직 사회에서 성공한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성을 능가하는 (극단적) 남성성과 친화력을 과시하며 칭송받는 아이러니를 잘 묘사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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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소설)보다 영화가 좋은 경우가 많지 않다던데 이 영화는 소설보다 좋았다. 김지영을 연기한 정유미도 좋았지만 지영의 엄마 미숙을 연기한 배우 김미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동생들 학교 보내느라 정작 자신의 학업을 다 마치지 못했던 어머니 인생을 본것 같아서 그런 느낌이 드나보다. 아들에게도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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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후기
#무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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