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으로의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처방하는 미디어아트의 효용성
공간은 메시지입니다. 모든 공간은 그 공간을 구획한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존재합니다. 눈치 없는 사람일지라도 특정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그 곳을 지배하는 메시지를 깨닫게 되죠. 독서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나 장례식장에서 즐겁게 뛰어다니는 사람을 보기 어려운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간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질서라는 이름의 권력에 순응하도록 학습되어 있으니까요.
가끔 메시지를 읽기 어려운 공간도 있습니다. 예술 전시공간이 특히 그렇습니다. 전시공간은 무언가를 보고 구경하도록 만들어진 공간이죠. 그러나 그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은 권력입니다. 예술가 또는 전시기획자는 기존의 질서를 뒤집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질서를 정합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예술전시는 이해하고 해석하기 퍽 까다롭습니다. 전시공간은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권력자의 의지와 그것을 즐기고 해석하는 사람들간에 묵언의 눈치싸움이 벌어지는 공간입니다. 때론 교감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딪히기도 하는거죠. 그래서 전시를 기획한 사람은 전시의 내용과 구성, 동선과 편의시설, 조명과 환기, 전시 공간의 규모와 위치와 같은 디테일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교감의 깊이와 질을 결정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63아트 전시관에서 열리는 ‘보타닉 이펙트(Botanic Effect)’전은 이 모든 요소들을 세세하게 신경 쓴 전시입니다.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미술관이라는 모토로 운영되는 이 공간은 그 위치만으로도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60층까지 이동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관객은 일상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일상과 예술을 한껏 분리시켜 놓은 곳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 품격있는(?) 공간이 될수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 예술의 일상화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걱정스러운 공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60층 전시장으로 수직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통유리 아래로 빠르게 소실되는 일상의 공간들을 보며 이 공간에서 예술은 이데아적 상상의 세계를 벗어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관람하러 간 전시가 이 탈일상적 공간에서 인간의 심연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하는 전시였네요. 바로 ‘보타닉 이펙트(Botanic Effect)’전이 그것입니다. 글쎄요. 말처럼 그게 가능할까요.
<보타닉 이펙트>전은 '팀보타'(TEAMBOTTA)라는 아티스트 프로젝트 그룹이 기획한 두번째 전시입니다. <보타닉 이펙트>전의 부제는 '당신의 마음과 마주해 본 적이 있나요?'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깊은 인간의 심연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을지 궁금했습니다.
먼저 전시장 입구부터 출구까지 모든 공간이 각종 식물과 미디어아트로 뒤덮혀 있습니다. 거기에 향기와 음악, 형형색색의 빛과 영상이 겹쳐지면서 환상적인 공간을 연출해냅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분야가 메시지적 관점에서 공간구성이었기에 화려한 3차원 홀로그램 영상이나 물체의 표면에 영상을 투사하여 독특한 질감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같은 매체적 기교보다는 전시의 메시지에 주목하면서 관람했습니다.
전시관은 순차적으로 <팀보타 숲>, <보라코끼리>, <문>, <흙>, <하얀 그림자>라는 제목의 총 다섯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다섯개의 공간에 어떤 필연적 순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세번째 공간인 <문>을 사이에 두고 각각 두개의 공간이 병렬적으로 기억과 존재를 상징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팀보타 숲>과 <보라코끼리>가 무의식에 머물러 있는 기억을 끄집어내 내면의 자아와 마주하게 하는 공간이라면 <흙>과 <하얀그림자>는 존재의 본성을 깨닫게 하는 메시지로 읽었습니다.
전시 내내 꽤 많은 글귀들을 접했지만 유독 잊혀지지 않는 단어는 '기억'이었습니다. 무의식에 잠재된 기억을 꺼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나의 행동과 습관과 양식들이 모두 이 잠재된 무의식에 기반해 있지만 그걸 인식의 영역으로 끄집어 내려면 특별한 의례가 필요하기 마련이지요. 강을 보고 바다라고 외쳤던 아이처럼 우리는 무지했거나 순수했던 존재였지만 수많은 경험과 교육,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외상을 통해 그 시절의 감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려 해도 무지하다는 평판의 걸림돌이 파도처럼 덮쳐오는 현실에서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죠. 첫번째 공간은 그 순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숲>이라는 몽환적 공간으로 보여줍니다.
<보라코끼리>는 서양에서 기억력의 상징인 '코끼리'와 대립되는 양면적 감정을 상징하는 '보라색'을 차용한 네이밍인 것 같습니다.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나'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인정할줄 아는 용기와 그 용기를 부추기는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코끼리는 무의식으로 나를 안내해줄 조력자의 다른 이름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흙>은 그렇게 대면한 자아의 본질입니다. 흙은 만물의 근원이며 모태이자 바로 나 자신입니다. 존재의 기원이기에 모든 감정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하얀 그림자>는 역설적 표현이지만 존재와 떼어놓을 수 없는 운명을 지칭합니다. 변화무쌍하지만 살아있는 한 그 누구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존재의 운명 아닐까요.
근본적인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전시는 아닙니다. 근본적 위안은 상담소를 찾아야겠죠. 그러나 현실과 조금 멀어질 필요가 있는, 내 안으로의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기꺼이 시간을 내 볼만한 전시입니다. 비주얼 아트인 만큼 인생샷을 찍기에도 더 없이 좋은 전시죠. 연말연시에 많은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명상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렇게 여유있는 관람을 위해 약간의 웨이팅은 어쩔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