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의 은총으로(프랑소와 오종, 2020)> 후기
얼마 전, 신년미사를 마치고 군중들과 인사를 나누던 교황이 불같이 화를 내는 장면이 뉴스를 탔다. 교황과 악수하기 위해 늘어선 군중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교황의 손을 무례하게 낚아챘기 때문. 이 모습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교황은 다음 날 사과의 메시지를 냈다.
“우리는 자주 인내심을 잃으며 나조차 그렇다. 어제 있었던 나쁜 본보기에 대해 사과한다”
성의를 입고 있지만 알고보면 교황도 나약한 인간이다. 제례를 주관하는 제사장에게 신성을 기대해서는 안될 터. 성직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질수도 없는 신의 섭리를 대리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곧잘 그 사실을 잊곤 한다.
화도내고 실수도 하는 존재지만 교황(사제)이 위대해 보이는 건 법관이 위대해 보이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연혁적으로도 두 직업은 뿌리가 같다.) 사제의 권위나 법관의 권위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거대한 조직과 그 조직에 집중된 권력에서 나온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곳에 올라앉아 법복과 성의에 가려진 채 실존의 불안함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이 법관과 사제들이다. 그들의 권력은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와 신념의 착시위에 쌓은 모래성이다.
그나마 법관의 권력은 견제를 받지만, 사제의 권력은 그렇지 않다. 사제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종교적 불경이 될 수 있기 때문. 종교는 심판의 공포위에서 세를 확장하고 종교인의 범죄나 부정부패는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는 토양위에서 독버섯 처럼 자란다.
영화 <신의 은총으로>는 카톨릭이라는 거대한 권력과 싸우는 사람들의 실화를 다뤘다. 프랑스 리옹 교구에서 청소년 사목활동을 하던 프레나 신부는 197~80년대 70여명의 보이스카웃 단원들을 성추행한다. 충격적인 경험으로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아이들의 상처는 거대한 교회의 권위에 덮혀버렸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날, 피해자 알렉상드르는 자신의 아이들이 프레나 신부와 접촉하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과거의 상흔을 들추어내는 것 조차 '신의 규범'으로 왜곡해버리는 보수 카톨릭 교단과 맞서 싸움을 시작한 그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사람은 없다.
내용이나 구도가 얼핏 영화 <스포트라이트>와 흡사하지만 언론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카톨릭 교단의 추문을 파헤치는 것과 평범한 일반인의 악전고투를 비교할 수는 없다. 영화 <신의 은총으로>는 철저하게 고립된 피해자들이 서로 연대하면서 진실과 정의에 접근해가는 이야기다.
영화는 각자 다른 삶을 살아온 세명의 피해자를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피해자들은 묻어두고 잊버버리려 하다가 마음을 바꾼다. 서로의 용기를 발판삼아 진실의 담장위로 올라선 그들에게 카톨릭 교단이 내세우는 위엄과 권위는 구토가 나올 정도로 추하다. 도과된 공소시효 조차 "신의 은총"이라고 표현하는 추기경의 모습에서 "성공한 쿠테타는 무죄"라고 면죄부를 주었던 이 땅의 법조계(정확히 말하면 검찰)를 떠올렸다면 내가 지나친 걸까.
카톨릭이든 그 어떤 절대화된 종교집단도, 아니 사법부나 검찰이나 마찬가지다. 도를 넘은 권력들은 스스로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서슴없이 진실을 왜곡한다. 그 왜곡은 때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때론 법치주의확립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다.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한다. 맞서 싸워 입게 될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 그러나 언젠가는 그 진실이 폭발하고 권력은 무너지게 된다는 걸 역사는 증명한다.
"그래도 신을 믿으세요?"
영화의 말미, 주인공 알렉상드르의 아들이 내뱉는 대사는 영화가 보여준 모든 불의와 부정을 한입에 삼켜버린다. 나는 이 말이 "언제까지 부정의한 질서를 믿으실건가요?”로 들렸다.
스스로의 권력에 도취된 채 진실을 은폐하는 제도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무작정 따라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검찰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이뤄나가는 우리들도 이 근본적인 질문 앞에 답변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