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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an 15. 2020

새해맞이 서점 산책 후기

신간코너에서 청년의 아픔을 읽다

독서 후기는 일기와 흡사하면서도 다르다. 신변잡기와 감정의 편린을 몇 줄의 글로 다독이는 행위가 일기라면 해를 거듭할수록 느슨해지는 기억력 때문에 틈틈이 공들여 읽은 책의 내용과 감상을 허무하게 날릴 수 없어 기어이 서툰 기록을 남기는 행위가 독서 후기다. 가상의 독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글쓰기라는 점에서도 후기는 일기와 다르지만 둘 다 자기 위안의 한 방편이라는 점에서 또 흡사하다.  

월말이 되면 소식지 담당이신 행정관님으로부터 후기 독촉을 받는다. 한 달에 두서너 권 정도 읽고 정기적으로 독서 모임을 하지만 독서 후기를 쓰는 책은 많지 않다. 게으른 사람이 무언가를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감시와 채근이 빠질 수 없는 법. 늘 후기의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마주>라는 제목의 인권 소식지를 만들었던 죄값(?)을 치른다는 생각으로 행정관님의 독촉을 묵묵히 듣는다.

최근에 읽기 시작한 앙드레 말로의 <희망>은 등장인물이 많고 너무 방대하여 다 읽고 나서도 쓸 엄두가 나지 않으니 새해 첫날 읽은 황윤 감독의 <사랑할까 먹을까 ; 어느 잡식가족의 돼지 관찰기>나,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교양있는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 대해 쓸까 고민하다가 최근에 나온 신작을 골라 읽고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싶어 주말에 아들과 함께 서점을 향했다.

후기 독촉을 받은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주말 서점은 백화점만큼이나 복잡했다. 신간이 사람들의 눈에 들려면 입구 근방에 누워있어야 유리하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베스트셀러 코너나 중고생 참고서 분야 서가로 가는 길목에 ‘새로 나온 책’이라고 적힌 작은 배너와 함께 단체로 누워있으면 효과가 더 좋다. 새 책 코너는 꼭 사서 읽지 않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읽는데도 요긴하다.

시선이 이끄는 대로 신간 코너에 걸음을 멈추고 한 권씩 제목을 스캔하는데 책 제목들이 한결같아 흥미롭다가 진로 고민에 한껏 위축된 아들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
“제 인생의 답이 없어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하마트면 열심히 살 뻔했다.”
“오늘은 이만 좀 쉴게요.”
    
제목에서 풍기는 관조적, 초월적 삶의 자세가 책의 표지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표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표정으로 누워있거나 이불속에서 목만 뺀 모습이다. “독서에 미쳐라”, “영어에 미쳐라.” “주식에 미쳐라”와 같이 한 분야에 몰입을 권하던 책들이 서가를 채웠던 나의 청년기가 떠올랐다.

아이엠에프 사태(1997)와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후폭풍(2007)은 정확하게 10년의 텀을 두고 우리를 습격했다. 강한 외부의 충격에 혼미해진 청년들은 살아남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내야 했다. 서점에는 <아침형 인간>(2003),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2003년 개정판)과 같은 책들이 불티나게 팔렸고 세기말부터 지속되어온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1997년) 열풍은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는 법. 열정의 끝은 상처였다. 기성세대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2010)라며 위로하려 했지만 청년들의 깊은 상심을 위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청년이라는 명패를 다음 세대가 물려받았지만 세상은 더 혹독해졌다. 열정도 ‘노오오력’도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청년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어>(2018)와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절망적인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건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뿐일 터. 지금 청년들은 가혹한 성공지상주의, 승자독식의 법칙이 지배했던 아비 세대의 죄 값을 치르는 중인지도 모른다.

후기를 쓰기 위해 서점산책을 나섰다가 한 권도 고르지 못하고 서점을 나섰다. 마음만 무거운 산책이었다. 어떤 책의 후기를 쓸까 다시 고민하다가 이 무거운 산책의 후기를 쓰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이 있다면 같은 시대를 통과하는 청년의 아픔을 나누고 싶었다. 이게 새해 첫 독서후기 대신 서점 산책 후기를 써 올리는 이유다. 책 표지만 보고 후기 썼다고 뭐라고 하시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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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서점 산책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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