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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Mar 08. 2020

존재를 이탈한 욕망의 파국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후기

돈은 수단이다. 수많은 욕망과 재화를 연결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지 않는 이상 돈은 그저 종이조각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돈은 정말 수단일 뿐일까?


스스로는 종이 한장의 가치밖에 안되지만 돈은 언제부터인가 다른 모든 사물이 저마다 가지는 가치의 총합을 넘어서는 의미가 되었다. 다르게 말해 세상의 모든 가치를 집약해서 일체화시킨 결과물이 바로 돈이다. 돈은 수단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으며 세상 모든 곳에서 동일한 뜻으로 존재함으로써 신과 동급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박해의 벼랑끝에서 신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주었던 초기 교회의 순교자들처럼 삶의 벼랑끝에 내몰린 사람들은 돈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도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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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는 튼튼한 동앗줄을 잡지 못한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집어든 가장 보잘 것 없는 물건이다. 지푸라기 따위가 생존을 지속시키는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지만, 정작 지푸라기에라도 연연할수밖에 없는 자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결국 추악한 욕망은 존재를 이탈해 파멸의 벼랑을 향해 질주한다. '지푸라기'가 고작 가방 하나 분량밖에 안되는 돈다발이라면 '짐승'은 바로 이탈한 욕망을 가리킨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굳이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을 연출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탐욕만 남은 짐승들은 목숨을 걸고 먹이(돈)을 쫒는다. 돈을 신과 같이 숭배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멘탈리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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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몸값으로 받은 돈이 여러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찰라의 위안이 되었다가 또다시 피를 부르듯, 돈을 쫒는 짐승들도 운명의 롤러코스터를 피할수 없다. 돈을 움켜쥐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한 것만 같은 충족감을 느끼지만 그 다음 걸음은 꼭 예측 못한 나락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방심하면 뒤통수로 둔기가 날아들고 옆구리로 칼이 파고든다.


"큰돈이 들어왔을떈 아무도 믿으면 안돼, 그게 가족일지라도"


미란을 죽이며 연희가 내뱉은 이 대사는 그녀의 죽음에 여지없이 되돌아 간다.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구했다고 믿었던 럭키스트라이크 담배가 결국 태영을 죽음으로 이끌기도 한다. 돈이 돌듯 행운도 액운도 쉽게 뒤바뀐다. 추악한 욕망만 남은 짐승들의 삶을 지푸라기 따위로 구원 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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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러 사람들이 아귀다툼을 하며 돈가방(다발)을 쫒는 영화는 처음이 아니다. 오락프로그램의 컨셉에 응용이 되었을정도로 흔한 소재다. 그럼에도 이런 류의 이야기가 생명력이 있는 것은 다양한 캐릭터와 상황으로 변주될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역시 매력있는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실종된 애인 때문에 사채를 쓰고 고리대금업자에게 쫓기는 태영(정우성), 가정폭력과 성매매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미란(신현빈), 사우나 카운터로 생계를 이어가는 중만(배성우), 일확천금으로 새삶을 꿈꾸는 연희(전도연)가 그들이다. 모두가 익히 보아왔던 캐릭터들이지만 진부하지 않다.


특히 전도연은 모든 장면에서 경탄이 절로 나올만큼 매력적이다. 말못할 사연을 감추고 있는 듯 아련하고 애틋하게 보이다가도 한순간 범접하기 힘들만큼 빛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배우다. 정말 대체 불가능하다고 할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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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역의 박지환은 영화 <1987>부터 눈여겨 봐왔지만 배역 이해도가 무척 좋은 배우다. 정우성과 나란히 나오는 장면이 꽤 많았는데 비주얼의 차이가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존재감이 빛났다. 메기역의 배진웅은 어디선가 보았던것 같기도 한데 그게 어떤 영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이번 역할이 인상적이었다.


긴장감 있는 전개방식이나 짜임새 있는 구성, 주조연 배우들의 열연, 영화속 공간이 보여주는 미감,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데 개봉시기가 조금 아쉬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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