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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Mar 10. 2020

고미숙 <열하일기 :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후기

휴일도 없이 방역 현장에서 비상시국을 보내는 분들에겐  죄송한 이야기지만 얼마 전부터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었다. 빈번하진 않았지만  달에 두세 번은 되었던 모임도,  한번 먹자는 연락도 뜸해졌다. 출퇴근을 위해 대중교통시설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사무실 아니면 방구석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바꿔놓은 일상의 모습이다.

일과 가정에만 집중할  있다는 점에서 평소 그리던 삶이긴 한데 무언가 밋밋하다. 아차, 봄이 오면 일주일 정도 훌쩍 여행이라도 다녀와야겠다는 결심을 했었구나. 불현듯 항공권 예매사이트를 뒤지던 지난겨울 생각이 났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더니  지금이 그런 상황 아닌가.

늘어난 시간만큼 이런저런 책을 들춰보는 시간도 늘었지만 손이 가는 것은 거의 업무와 연관된 책들이다. 아아. 이것도 직업병인가 싶어 좌절하던 차에  <열하일기> 만났다. 여행 대신 여행기는 어떠냐는 지인의 추천이 있었다.  

<열하일기> 조선의 문예 부흥기로 일컬어지는 18세기, 노론 세도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벼슬을 멀리하며 세상을 관조하던 당대의 프리랜서 연암 박지원의 저술이다. 고전이라는  해석본일지라도 원문을 읽어야  뜻을 제대로 이해할 텐데  만남부터 기가 눌리기 싫어 일단 고미숙 선생이 풀어낸 <열하일기 :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작은길 출판, 296p)으로 시작했다. 살다 보면 원문을 완독할 날도 있겠지.

연암이 연경(지금의 북경) 거쳐 열하를 가게  것은 마흔이 훌쩍 넘어서다. 그것도 벼슬을 하는 친척 덕분에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축하연 사절단 일행으로  좋게 합류하게  것이다. 행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건륭제는 자신의 칠순 생일을 맞아 열하로 피서를 떠나있었고 조선의 축하사절을 불러들였다.

당초 목적지였던 연경에서 말을 타고 5일이나  가야 하는 . 연암은 고행이나 다름없는 여행 중에도 세세한 경로와 함께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은 물론, 현지인과 나눈 대화, 역사, 문화, 음악, 풍속, 예술과 과학기술  선진 문명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과 통찰을 섬세하고도 해학적인 필치로 남겼다.  

 역시 여행지에선 인증샷과 탐식에 집중하다가 돌아와서는 ‘남는  사진밖에 없다 한탄하는 사람 중에 하나지만 고행에 가까운 여행을 하면서도  하나로 이런 기록들을 남긴 연암이라는 사람의 면면에는 감탄을 하지 않을  없었다.


연암이 살던 18세기는 주류 지식인들 사이에서 북벌론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였다. 북벌론은 사실상 청에 대항할 힘도 없으면서 말로만 ‘정벌 외치던 내치용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연암은 존명반청(尊明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꼬집으며 청에서  기왓장 하나에도,  무더기에도 배울 것이 있다고 강조한다. 깨진 기왓장으로 벽틈을 메꾸고 말똥을 모아 거름으로 사용하는 실리적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열하일기> 연암이라는 인간이 아니면 불가능한 업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연암은 과거급제의 뜻을 접고 어린 시절부터 저잣거리로 나가 신분과 귀천을 따지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서른  무렵에는, 당대 최고의 천재들이라 일컬어지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 등과 어울리며 북학실학파의 중심에 있었다.

연암의 저술이 시대를 넘어 감동을 주는 것은 스스로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기성의 질서에도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낡은 이념이나 관습보다 인간의 삶과 존엄함을 가장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연암이 계급과 신분질서, 교조적 성리학에 매몰된 사람이었다면 <열하일기> 같은 탁월한 저술을 남길  있었을까.

 줄의 글만으로 수백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던 지식인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가 남긴 정신의 흔적을 엿볼  있다는  행운이다. 어차피 올봄을 느긋한 여행으로 보내기는 글렀다. 시간  때마다 방구석에서 연암의 여행기를 만나보는  어떨까. 비록 몸은 방구석이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지혜를 키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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