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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May 15. 2020

을로 살아가는, 을로 죽어가는

신간 <임계장 이야기> 후기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한 사람이 자살했다. 죽기 직전에 고인은 서툰 글씨로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그 옆에 ‘감사하다’는 메모를 남겼다. 애지중지 키우던 막내딸에게는 ‘사랑한다’고 적은 봉투 하나를 남겼다. 봉투 안에는 꼬깃꼬깃한 오만원권 몇 장이 들어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순간에도 ‘감사’와 ‘사랑’을 떠올린 그 사람은 거룩한 종교인이나 학식이 높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무실과 화장실과 옷장과 부엌이 놀랍도록 일체화된, 고인이 마지막까지 근무했던 공간이 언론에 공개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그가 견뎌야 했던 고통에 주목했다. 고인은 59세 아파트 경비원이었다.

경비원이 또?

뭔가 기시감이 들어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몇 년 전의 경비원 분신 사건이 검색된다. 이번엔 분신이 아니라 투신이다. 방법만 달랐지 원인은 유사하다. 경비원을 노비처럼 여기는 몰지각과 삐뚤어진 신분의식, 열악한 노동환경, 주변의 방관과 무관심,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사회분위기, 구제수단이 없는 사회시스템 전체가 복합적으로 작동한 결과다.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조문 행렬이 이어지지만 우리는 또 고인의 명복을 빌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잊을 것이다. 급조된 분노와 대책 없는 망각은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려 노력하는 사람의 희망을 끊는다. 대책이 없고 희망 없는 세상에서 ‘을’들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서서히 죽어간다.

경비원의 자살 소식을 접할 때 나는 하필 <임계장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임계장’은 직책의 이름이 아니라 ‘임시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다. 30년 넘게 공기업 직원으로 일하고 퇴사한 저자 조정진(63세)씨의 인생 2막은 아파트와 빌딩 경비실에서 펼쳐졌다.

맨몸뚱이 외엔 딱히 내놓을 것이 없는 노인 노동자들은 경비, 청소, 간병과 같이 고되고 기피하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 고령의 육체가 견뎌낼 수 있는 노동의 한계가 명확하듯, 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인격적 모멸감에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모멸감을 견뎌내는 일에는 댓가가 주어지지 않는다. 부당한 처우 속에서 온갖 노동을 강요받지만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다.

작가 조정진은 버스회사 배차담당을 시작으로 24시간 교대제인 아파트 경비원과 빌딩경비원 병행하는 중노동을 감수했고 터미널 보안요원으로 일하다가 쓰러져 해고되었다. 틈틈이 자신의 경험을 기록해서 수십권의 노동일지를 기록한 필자는 병상에서 원고를 완성했다.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써내려간 르포르타쥬이면서도 ‘삶이 문학이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주옥같은 문장들이 두드러진다.   

“자네는 경비원도 사람이라 생각하지?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네.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폐기물 더미에서 숨을 쉴수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초소에서 잘 수 있겠어? 사람이라면 어떻게 석면가루 날리는 지하실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자네가 사람으로 대접받을 생각으로 이 아파트에 왔다면 내일이라도 떠나게. 아파트 경비원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비원은 할 수가 없어.” (p.22)

이토록 자조적인 말을 충고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파트 경비원들에겐 이 또한 엄혹한 현실 아닐까. <임계장 이야기>는 우리가 흔하게 보아 넘긴 고령 노동자의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끝도 없이 명복을 빌면서도 반성하지 않는 사회에서 을로 살고, 을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에게 빈 어깨라도 내어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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