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19)> 후기
누군가의 한숨 같은 독백이 끝나면 왁자지껄한 술자리 풍경이 이어진다.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듯 서로 술을 권하는데 갑자기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거짓말처럼 쓰러진다. 감독님! 감독님! 놀란 사람들이 애타게 쓰러진 남자를 깨워보지만 감독이고 뭐고 죽은 남자가 일어날 리 없다. 감독 김초희 이름 석자가 바로 이 장면 뒤에 나타난다. 홍상수 시대의 종말을 말하는 건가. 김초희 감독의 독립 선언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찬실이(강말금 분)의 막막한 표정이 잠시 나오더니 4:3의 화면 비율이 16:9로 바뀌며 영화가 시작된다.
트럭 한대 올라올 수 없는 오르막길을 올라 반 지하도 아니고 네모 반듯하지도 않은 이상한 방에 짐을 푼 찬실이는 걱정이 태산이다. 막막한 현실 때문에 살이 5kg이나 빠졌다. 시집은 못 가도 천년만년 좋아하는 사람들과 영화는 계속 찍고 살 줄 알았던 찬실이는 갑작스러운 현실이 버겁다.
찬실이는 나름 능력을 인정받는 피디였다. 그러나 감독이 사라지자 그녀의 자리도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녀를 한보(한국영화의 보배)라고 부르며 추켜주던 영화사 대표도 안면을 바꿨고 영화판에서 얼굴이 익은 후배 스탭들은 그녀의 실직을 동정한다. 박복하기 그지없는 마흔 살 찬실이에게 무슨 복이 많다는 건지 영화의 중반부가 되도록 당최 알 수가 없다.
한가지 희망적인 변화라면 찬실이가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배우 소피의 집에서 만난 단편영화감독 김영(배유람 분)의 등장. 연애 한번 못한 찬실이에게 김영은 싱숭생숭한 존재다. 꿈에서는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지만 그건 연애고자 찬실이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판타지일 뿐. 현실에서는 오즈 야스지로와 크리스토퍼 놀란이 함께 합작 영화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이야기다.
"그래도 전 크리스토퍼 놀란 좋아해요."
서로 영화취향을 물어보다가 남자(김영감독)가 점점 재미있는 영화가 좋아진다고 고백하자 찬실이의 표정이 뜨악해진다. 놀란이요?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인줄 몰랐다는 듯 그녀는 정말 놀란다. 놀란 말고도 홍콩영화를 좋아한다는 김영과 마지못해 한발 물러서 “어렸을 때 장국영” 을 좋아했었다는 그녀가 인연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말 본인이 장국영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영화 뭐지?
런닝셔츠 차림의 자칭 장국영(김영민 분)은 귀신이다. 주인 할머니의 죽은 딸이 살던 방에 수년째 붙어 살았다. 찬실이의 이름이며 근황이며 심지어 속마음까지 꿰고 있는 이 귀신은 오후 3시만 되면 장만옥을 만나러가는지 극장으로 달려가는(아비정전의 설정) 진짜 장국영이다. 찬실이는 점점 이 귀신에게 신경이 쓰인다. 무엇보다 귀신은 찬실이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데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도와주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의리남 아닌가. 삶의 변화가 생긴 후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찬실이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문제”라고 진단해준 장국영의 조언에 따라 깊은 생각에 빠진다.
찬실이의 고민은 대략 이런 거다. 영화를 그만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필이면 이때 나타난 남자 김영과는 잘 될 수 있을까. 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론 귀신 장국영이 이 물음에 답을 주진 않는다. 김영에게 섣부른 고백을 하고 많이 민망한 경험을 하며 찬실이 역시 갈팡질팡 한다. 과연 찬실이는 자기 삶에서 다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보고 나면 이 영화가 단지 마흔에 실직을 한 한 여성의 성장기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걸 알게 된다. 찬실이는 에밀 쿠스르리차의 <집시의 시간>을 보고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후 평생 영화만 끌어안고 살아온 영화인이다. 영화를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던 찬실이에게 귀신 장국영은 찬실의 깊은 심연에서 다짐과 설렘을 퍼 올려주는 또 다른 자아다. 그는 영화를 포기하려는 찬실이를 붙들고 속삭여준다.
처음엔 냉랭했던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분) 역시 찬실이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인물이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끔씩 한글을 물어보던 할머니가 주민센터에서 내준 숙제로 지은 시를 읽고 나서 찬실이는 펑펑 울고 만다. 딸을 먼저 보낸 할머니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긴 한 줄의 시가 찬실이에게 울림을 주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돌아가지 못할, 무심코 지나버린 젊은 날에 대한 회한일까. 아니면 죽었다가도 꽃처럼 다시 피어나는 영화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더 살고 싶지 않으니 귀신을 만나면 자기 좀 잡아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할머니가 휘영청 보름달에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비는 모습에서도 찬실이는 절대 놓을 수 없는 삶에 대한 희망과 연민을 떠올린다.
다시 한번 영화를 찍자는 후배들을 앞세우고 뒤에서 랜턴 하나로 어두운 골목길을 밝혀주던 찬실이가 돌연 눈을 감고 중얼거린다.
영화. 마흔살 찬실이에게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그리고 보고 싶은 건 오로지 영화다. 영화만이 마음을 설레게 하고 가슴을 뛰게 하지 않았나. 랜턴 불빛 때문에 성스럽게 보이는 찬실이의 독백이 끝나면 철로를 따라 설원을 헤치고 천천히 달려가는 기차가 스크린 속에 펼처진다. 객석에 홀로 앉아 영화를 지켜보던 장국영이 천천히 기립박수를 치다가 화면의 왼쪽으로 사라진다. 달리는 기차의 모습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최초의 무성영화 <기차의 도착>에 대한 오마주인가.
엔딩크레딧과 함께 울려퍼지는 이희문의 노래 가사가 절묘하다. 비록 집은 없고 돈도 없고, 결혼도 못했지만 영화가 있어 행복한 찬실이에게 누가 감히 복도 지지리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영화가 좋아 영화의 넓은 그늘 아래 머물며 자신의 삶을 가득 채워가는 '찐' 영화인들의 사랑과 고민을 담아낸 한국판 <시네마 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