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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Aug 31. 2020

습작, 2020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산책자의 눈으로 담아 낸 코로나 시대의 일상

소설가 구보씨는 1934년 식민지 경성거리를 쏘다니며 직업도 아내도 없이 살아가는 우울한 자신의 처지를 냉소합니다. 구보씨는 동경에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지만 한편으로는 연애중인 연인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질투를 하고 술집 여종업원에게 찍접거리다 퇴짜를 맞는 전형적인 찌질남이죠. 그의 하루를 그린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근대화가 막 시작된 식민도시 경성의 풍경을 근대적 시선으로 담아냅니다. 화신백화점이며 조선은행이며 당대의 근대건축들이 구보씨의 시선을 통해 전달됩니다. 밤 늦도록 도시를 배회하는 사람들 역시 구보씨 만큼이나 우울합니다. 그들 역시 식민 시대를 견뎌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죠. 구보씨는 좋은 소설을 쓰기로 다짐하며 귀가길에 오릅니다. 그에게 소설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2020년 서울을 사는 저는 지금의 서울이 그때의 경성과 얼마나 다른가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소설가 구보씨와 또 얼마나 다를까요. 저는 근대적 문명이 막 태동하던 30년대의 식민지 경성거리와 그 곳을 배회하는 소설가 구보씨의 모습에서 현 시대의 풍경을 봅니다. 코로나라는 예기치 못한 역병을 앓는 우리 역시 어떤 미래가 닥치게 될지 알지 못한채 암울한 현실을 견디고 있지 않나요.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출구를 모색하는 구보씨처럼 저 역시 우울하지만 희망을 버리진 않습니다. 어줍잖은 취미지만, 제가 서울의 풍경을 그리는 이유입니다.

2020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연작, 춘래불사춘 / 무너 / 40.9 x 31.8 / mixed media

 

저의 습작 <2020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시리즈는 코로나 시대의 서울 풍경을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바라봅니다. 산책자의 눈으로 담아낸 서울 풍경은 건조하고 신산스럽습니다.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간 도시에도 여전히 봄이 다녀갔고, 여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햇볕은 찬란하고 노을은 평화롭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습니다. 봄이 왔지만 꽃이 폈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우린 어느새 마스크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린 채 세상을 향해 눈과 귀만 내놓았습니다. 호흡(呼吸)을 담당하는 기관은 필터의 보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감추었습니다.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결은 세상과 나, 그리고 나와 타자를 연결하는 순환의 매커니즘이었지만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오로지 경계하고 살필 뿐입니다. 우리는 이 도시에 고립된 채 얼마나 더 버텨내야 할까요.


2020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연작 - 수송동길 / 33.4 x 21.2 / oil painting


매거진의 이전글 <주말마다 그린그림>을 다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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