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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n 12. 2021

내 쉴곳은 정말 내 집 뿐인가

이동을 위해 불편과 위험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 이야기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우는 집 내 집뿐이리  


하필 ‘내 집뿐’이라는 노래의 멜로디가 울리는 곳은 지하철 환승 통로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3호선에서 5호선을 갈아타기 위해 긴 줄을 이룬 일군의 사람들이 주춤거리면서 겨우 한 발자국씩 걸음을 내디딘다. 긴 줄의 맨 앞에는 장애인 한 분이 휠체어 리프트에 몸을 맡기고 있다.


공중에 붕 떠서 움직이는 리프트를 굳이 위험한 계단에 설치한 이유가 뭘까. 장애인이나 이동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터를 더 만들면 좋지 않았을까.


불가피하게 기계에 몸을 맡겨야만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장애인 뿐만이 아니다. 노인이나 유아를 동반한 사람, 임산부, 큰 짐을 가지고 지하철을 탈수밖에 없는 서민들도 마찬가지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인간의 이동을 보조하는 수단인 것처럼 휠체어 리프트도 다를 것이 없어야 하지만, 그건 당위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뿐, 휠체어 리프트는 장애인만을 위한 시설인데다가 오히려 매우 불편하고 또 위험하는 점에서 다른 이동수단과 다르다.


먼저 리프트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역무원을 호출해야 한다. 역무원이 자리를 비우거나 협조적이지 않을 경우, 그만큼 이동시간은 지체된다. 이동시간의 지연은 리프트의 위험성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리프트에서 발생한 사고는 회복 불가능한 중상이나 사망으로 이어진다. 실제 장애인들이 리프트로 이동하던 중 사고로 사망한 사례가 꽤 있다. 누군가 이동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를 정상적인 문명사회라고 할수 있을까.


휠체어 리프트의 문제는 위험과 불편뿐이 아니다. 리프트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불가피하게 주변 통행인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 좁은 계단을 교행하는 상황에서 ‘내 쉴곳은 나의 집’ 따위의 요란한 멜로디음을 내며 작동하는 리프트에 다중의 시선이 모아지는건 당연한 일이다. 내 쉴곳은 ‘나의 집’ 뿐인데 왜 밖에 나와서 이 고생을 하느냐고 비웃는것만 같다. 슬로우모션 비디오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기계 위에서 이동의 자유를 누려야 할 한 사람의 시민은 공중에 민폐를 끼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모멸적 구조의 리프트를 공공시설이라고 불러도 되는건지 나는 모르겠다.


즐거운 나의집(Home sweet home)이라는 제목의 이 멜로디는 사실 미국내전 당시 고향을 떠난 군인들에게 위로가 되던 노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던 군인들에게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던 ‘내 집’의 기억은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겠는가. 그러나 이동을 위해 일상적으로 위험과 불편, 모멸감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멜로디는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조롱처럼 느껴질 뿐.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누구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 저마다 가진 권리를 향유하고 그 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내가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단지 ‘내 집 뿐’이라면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우리는 ‘나의 집’을 나와 그 어디에서도 자유롭고 안전하며 편안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사진출처 : 비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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