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의 <읽고 쓰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후기
읽기와 쓰기의 탄생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소리의 형태로 세상의 질서를 만들었다. 인간은 신의 말씀(소리)에 반응하면서 두려움(종교)과 지혜(학문)을 키워나갔다. 소리는 청각기관을 통해 인체에 공명하는 파동이다. 소리라는 파동은 무엇보다 강렬한 변화를 만들어냈지만 찰라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소리를 잡아두기 위해서 인간은 기억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 호메로스가 구전했다는 ‘일리아스’ ‘오딧세이’의 방대한 양을 생각해 보라. 말씀(소리)을 잡아두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결국 문자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말하고 듣는 행위의 공간적, 시간적 제약은 문자의 발명 이후에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읽는 행위는 듣는 행위의 한계를 보완하고 확장했으며, 쓰는 행위는 말하는 행위의 시공간적 제약을 무너뜨렸다. 결국 말씀(소리)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보편적 진리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읽는 행위
책은 진리의 보고다. 천문과 지리 사이에서 사람이 그려낸 무늬(인문)가 모두 책 안에 담겨있다. 과거의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별자리에 의존해 길을 찾았다면 문자가 발명된 이후 인간은 책 속에서 진리를 찾게 되었다. 이슬람의 경전 코란은 그 자체로 읽는다는 의미다. 낭독은 인간의 모든 장기를 이용해서 신의 말씀을 새기고 우주에 퍼뜨리는 행위다. 근대 이후, 읽는 행위가 개인화되면서 낭독은 점차 사라졌지만 독서는 말씀의 권위를 해체하고 진리를 대중화했다. 디지털 혁명 역시 종이책 중심의 독서행위를 음성으로 영상으로 탈영토화 했다. 노동에서 소외되고 가족이라는 감정노동 체계 안에서 지칠대로 지친 현대인에게 책은 내 몸과 삼라만상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통로다.
쓰는 행위
언젠가부터 쓰는 행위는 전문가의 영역으로 오인되고 있다. 개인적인 글쓰기는 고작해야 일기나 후기에 머물렀다. 쓰는 행위가 생산자와 소비자로 철저하게 이분화된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읽는 행위와 분리할 수 없다. 읽었으면 써야 한다. 들었으면 말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미숙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읽기가 타자의 언어와 접속하는 것이라면 쓰기는 그 접속에서 창조적 변용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쓴다는 행위는 직립을 통해 손을 이용할줄 알게 된 인간 고유의 본성이다. 생성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 본연의 에로스적 창조행위다. 글을 쓰기 위해서 별다른 재능이 필요한 건 아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질문과 갈망, 호기심과 경이로움 같은 감정이다. 잘 쓰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잘써야 한다는 강박이 글쓰기를 방해한다.
글을 쓰기 위한 팁
저자는 책의 절반을 할애해 칼럼이나 여행기 같은 글쓰기의 기법을 소개한다. 기법이라니. 글쓰기를 인간의 본질적 창조행위라고 정의해 놓고 기법(책에서는 초식이라고 되어 있다)을 나열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글쓰기는 기법 보다는 습관과 동기부여가 우선인 것 같다. 일기나 후기 따위의 잡문을 생활화하는게 도움이 된다. 기한을 정해 후기를 써내야하는 독서모임에 가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물론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면 더 할나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