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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Aug 12. 2021

대체 사랑이 뭐니?

고요한 장편소설 <결혼은 세번쯤 하는게 좋아> 후기

사랑이라는 감정에 회의적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무척 소모적인 일이기 때문. 사랑은 실체도 없다. 조건없는 사랑, 지고지순한 사랑, 영원한 사랑 등등 사랑을 수식하는 말이 현란할수록 되려 사랑의 실속없음이 드러날   어떤 말도 사랑의 본질을 표현할  없다. 사랑이면 사랑이지 사랑에 무슨 수식이 필요한가.  본질을 흐리는 말이다. 알맹이  파먹고 껍질만 남은 견과류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한(다고 착각을 한)다. 사랑의 증거라며 프로포즈를 하고 맹세를 하고 결혼을 한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처럼 하얗게 될 때까지 서로의 곁을 지켜주겠노라고 한 서약도 사실 거짓말에 가깝다. 살을 섞으며 수십년을 살아도 막상 헤어질 때면 한푼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 악을 쓰고 독을 뿜는 장면을 봐라. 정말 한 때는 사랑한걸까. 사랑이 식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애초부터 사랑은 없었다. 그저 계약이 있었을 뿐이다.


사랑을 결혼이라는 제도에 가두는 것도 석연치 않다. 마치 결혼이라는 허가를 내주고 사랑이라는 조건을 이행하도록 강요하는 느낌이다. 결혼에 이를 가능성이 없는 사랑, 제도가 보장해주지 않는 사랑, 결혼 이후에 불현듯 찾아오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어쩌면 사랑은 인류의 번식을 위해 수천년 전부터 이데롤로기적으로 조작되고 생물학적으로 각인되어버린 감정 아닐까. 그렇다면 결혼은 그 복잡한 관계와 어지러운 감정을 무력화하고 획일적인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다. 그럼에도 사랑이 숭고한 감정으로 포장된 이유는 사랑만이 창조라는 신의 의지를 지속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그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피조물에 부여된 숙명같은 것일테고.


문제는 번식의 질서에 기여할 수 없는, 성적 능력을 상실한, 노년의 사랑이다. 노년의 사랑은 비난받기 일쑤다. 성욕이 거세된 육체, 번식이 아예 불가능한 사이에서 사랑이 가능하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짜 사랑 아닐까 싶지만 사람들의 관습적 혐오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은 번식을 위해 고안되고 학습된 감정이고 노년의 사랑은 그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죽기 직전에, 그것도 한참 어린 연인과 사랑을 시작한다면 사랑은 유산을 노린 치정극쯤으로 매도될게 분명하다. 소설 <결혼은 세번쯤 하는게 좋아>에서도 그런 사랑이 나온다. 데이비드 장은 뉴욕에 불법 체류중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안아주고 돈을 버는, 스너글러라는 직업으로 연명한다. 불안한 신분으로 뉴욕에 정착하기 위해 그는 자신보다 서른살도 더 많은 마거릿과 결혼을 꿈꾼다. 마거릿 역시 죽을때까지 안전하고 포근하게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욕망을 채우고, 자식을 낳아 번식하고, 물질을 공유하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이행하기 위해 하는 결혼과 외롭지 않은 죽음을 함께 준비하고, 남은자에게 정주의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계약을 이행하는 결혼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걸까. 어차피 결혼이라는 건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맺는 계약일진대 마거릿과 데이비드의 결혼을 누가 사랑이 아니라고 비난할수 있을까.  소설 <결혼은 세번쯤 하는게 좋아>는 사랑이 무엇인지, 결혼이 무엇인지 묻는다.



#스포최소화 #발칙한상상 #발칙한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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