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드로잉 작업 3
가끔 반나절 휴가를 내고 낯선 거리를 배회할 때가 있다. 정신 나간 짓 아니냐고 하겠지만, 나는 며칠 짜리 휴가보다 쉼표 같은 반나절 정도의 배회가 더 좋다. 낯선 곳을 아무 계획 없이 돌아다닐 때 난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배회에는 조건이 있다. 가급적 낯선 장소여야 하고, 혼자여야 한다. 설령 익숙한 장소더라도 낯선 골목길로 다녀야 하고, 무언가 사 먹어야 할 때도 가본 곳은 가지 않는다. 이렇게 이방인의 최소조건을 충족하고 나서야 배회는 즐거워진다.
공장과 음식점과 문화공간이 뒤섞인 문래동은 배회하기 좋은 장소다. 기름때 흥건한 바닥을 지나가느라 고개를 떨구고 걷지만 않는다면 볼 것도 꽤 많다. 한때 방직공장이 몰려 있었고, 철공소 노동자들의 용접하는 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울 때도 있었던 곳이다. 값싼 중국산 공산품이 시장을 뒤덮으면서 하나둘 문을 닫는 공장들이 생겨났고, 마침 창작공간이 필요하던 젊은 예술가들이 비어있는 철공소에 자리 잡으면서 지금의 문래동 풍경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배회할 때 시간 때우기로 좋은 곳은 뭐니 뭐니해도 갤러리다. 문래동에도 갤러리가 몇군데 있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여유 있게 그림을 볼 수 있기도 하지만 갤러리가 위치한 낡은 건물을 들어가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지난여름 어느 날, 전시 중인 갤러리를 찾던 중에 허름한 건물의 2층 계단을 내려오다가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플라타나스 그늘을 보았다. 진한 초록색 페인트 위로 묵은 기름때가 더께를 이루고 있는 문틀 위로 가로수 그림자가 드리워져 더 깊고 진한 초록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한 장 남겼을 뿐인데 나중에 확인한 사진에는 한 커플이 담겨 있었다. 헤어지기 직전일까. 다투고 화해하는 모습일까. 그들 옆을 지나쳤을 텐데 기억이 분명치 않다. 어떤 상황이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심각한 표정의 두 청춘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낡은 문틀을 프레임으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인상적으로 남았다. 그리고 싱그러운 여름, 싱그러운 청춘이 내 그림에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