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은 정오부터 오후 한시까지 고작 한시간에 불과하다. 딱 밥 한끼 먹는데 맞춤한 시간이다. 이 시간의 직장 밀집지역 풍경은 초대형 뮤지컬 무대의 역동적인 군무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분초를 다투어 몰려나온 사람들이 밥집 앞에서 긴 줄을 서고, 꾸역꾸역 밥을 먹고, 악착같이 커피를 마시고, 출입증을 매단채로 거리를 활보한다.
한시간에 그게 가능해? 결혼하고 직장을 다녀본 경험이 별로 없는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볼 일이다. 자자. 생각해봐. 우린 ‘하면 된다’의 기치아래 태어나 ‘불가능은 없다’는 광고카피의 시대를 살아왔고, 앞으로도 얼마간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살아야 할 세대잖아. 뭐가 불가능하겠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칙보다는 요령이다. 점심시간은 틀림없이 요령이 지배하는 시간이다. 만약 당신이 ‘법과 원칙’에 충실한 성향이라 반드시 열두시 정오알람을 듣고 나서야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특이 체질이라면 할수 없다. 긴 줄을 서야 하고, 밥을 먹자마자 이빨에 낀 밥알을 되씹으며 사무실로 돌아와야 한다. 물론 당신과 같이 정오알람을 듣고 일어서는, 법정스님 같은 동료는 거의 없을테니 떼밥충들 사이에서 혼밥을 해야하는 민망함도 감수해야 한다. 요령껏 삼십분 먼저 자리를 뜬 사람들이 밥을 다 먹고 여유있게 커피나 산책을 즐길때 제 시간을 지켰다는 이유로 줄을 서 있어야 하는 이 부조리의 현실을 억울해하며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커피도 쿠폰도 통신사 할인도 더치페이도 없던 그런 유토피아 같은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맛집정보나 인스타그램 따위는 더더욱 상상도 못할 그 시대.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화기애애하게 도시락 같은 걸로 점심을 먹고 잠시 잠깐이라도 낮잠을 즐겼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늘어나는 빌딩 숫자만큼 꾸역꾸역 사람들이 늘어나고, 대한민국 축구가 악착같이 4강에 올라가고, 인터넷 강국의 국뽕이 차오르고, 사람들은 욕망의 눈높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커피원두는 뭘로할지, 샷을 추가할건지 말건지, 먹고 갈건지 포장할건지, 통신사 할인이나 적립을 할건지 말건지, 일일이 묻고 선택해야 했다. 실로 자본주의의 핵심은 선택이었고, 한시간의 점심시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던 사람들의 다양성과 욕망을 충족하기엔 터무니 없이 짧은 시간인 것이다.
사람들을 관리하는 시스템의 입장은 어떨까. 시스템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점심시간은 단지 밥을 먹고 노동력을 비축하는 시간에 불과한가. 철저한 복무점검으로 개인의 욕망을 거세하고 일탈을 예방하는 것이 생산성 향상에 최적의 방식일까. 어쩌면 직장인들의 일탈 욕구를 효과적으로 중화하고 시간적 제약에 조급해진 소비심리를 부추겨 주머니를 터는 것이 더 큰 이익이 아닐까. 과연 영악한 시스템이라 하지 않을 수 없군.
그렇게 인간의 일탈 욕망과 자본의 영악함이 이종교배를 통해 ‘법과 원칙’보다는 ‘눈치와 요령’이 지배하는 무질서와 부조리의 점심시간을 낳았던 것이리.
일을 마무리하느라 남들보다 늦게 점심을 먹으러 나와 홀로 맥도날드 매장 한 켠에서 북받치는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이 글을 끄적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법과 원칙을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남들만큼 넉넉한 점심시간을 보내지 못했음에도 햄버거를 다 먹고 글을 적을 시간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아 쓸쓸한 법과 원칙의 날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