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능력이라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그래서 ‘능력’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할 만큼 당연한 행위인걸. 아침에 눈을 뜨면 두 발이 바닥을 딛고, 몸은 저절로 앞으로 나아가지. 그것을 일상이라 불렀고, 지금껏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흘려보냈나봐. 뒤집고 기고 일어서서 두발로 걷는데까지 소요되는 일년 조금 넘는 고군분투의 시기를 기억한다면 그렇게 무감하진 않았을거야.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최근 들어 몇 번째인지조차 헤아리기 어렵다. 워커에 기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던 아버지는 작은 문턱 하나에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 스스로 일어서지 못한다. 다행히 어머니가 곁에 있어 위기를 넘기지만, 어머니도 노인이긴 마찬가지라 다시 일으켜세우는데 애를 먹는다. 몇년전 고관절 골절을 당하신 후 날이 갈수록 기력이 쇠하고 있다. 국선도 사범을 하며 칠십대까진 매일 아침 물구나무를 선 채로 명상을 할 만큼 체력에 자신이 있던 분이셨기에 허망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언제 더 큰 비극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이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
노쇠해간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약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을 하나씩 잃어가는 과정이다. 지팡이에 의존하다가, 워커에 기대다가,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는 순간—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존엄이 조용히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나약해진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때로 어떤 육체적 고통보다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흔들리는 걸음을 바라보며 다른 것을 보기 시작했다. 넘어지면서도 다시 워커를 붙잡는 손,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몸을 일으키는 그 순간이 어쩌면 아버지의 남은 삶에 가장 밀도 높은 순간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겠지. 아무렇지 않게 걷던 모든 날들이 사실은 신이 조용히 건네던 선물이었음을, 우리는 잃어갈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두 발로 땅을 딛는 일.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허락이었다. 그리고 그 허락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일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워커가 삐걱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오늘 내 발이 땅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