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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Feb 09. 2016

나에겐 행복할  자유가 있다.

영화 '브루클린의 멋진주말'(리처드 론크레인, 2014) 후기  

한 곳에 오래 머물다가 이사를 해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나 혼을 빼놓는 일인지. 집에 보관하는 잡동사니 물건이라는 것들이 꺼내놓지 않아서 그렇지 정리를 위해 한번 쑤시기 시작하면 부비트랩보다 무서운 것들이다.       

아이가 처음 크레용을 쥐고 의미 없이 휘갈겨놓은 낙서뭉치나 녀석이 태어나던 날의 5대 일간지, 아내에게서 받은 편지 꾸러미(이건 버리라고 난리를 치는 가운데 가까스로 지켜온 것이라 오기가 나서라도 버리지 못하는 잡동사니 중 최고의 잡동사니다.), 그보다 오래된 이런저런 사연이 기록된 내 일기와 편지뭉치들, 헛웃음이 나오는 습작노트들, 빛바랜 사진첩들, 재생이 될까 싶은 LP나 레코딩 테입, 5mm 비디오테입, 뭐 한두 개가 아니다.      

그것뿐인가. 입지도 않는 옷가지며 이불 보따리며 촌스럽기 그지없는 침구류들을 대체 왜 여태껏 뭉개고 보관했던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다음 이사 때는 어김없이 버려야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낑낑거리고 옮겨놓은 후 다시 베란다 붙박이나 장롱 깊숙이 처박아 둔 것들이 어디 한둘인가. 이사를 위해 부동산을 찾아다니고 온라인 매물을 검색하고 집 구경을 다니며 눈치를 보고 이사날짜를 잡고 계약서를 쓰고 하는 번잡스러운 일련의 행위들까지 생각하면 아.. 정말 끔찍하다.      


한 이십년 가까이 살아온 내가 이 정도인데 40년을 같이 살면 오죽할까. 사실 40년을 살던 집에서 벗어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거의 관혼상제에 준하는 대사라고 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알렉스’(모건 프리먼)와 퇴직 교사 ‘루스’(다이언 키튼)는 이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앞두고 경황이 없다. 그들이 집을 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직 엘리베이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와야 하는 계단식 아파트, 그들은 더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하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40년 따스한 햇살과 잠자리를 제공해준 집이라 그런지 도통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며 계약을 부추기는 부동산 중개업자와 백주대낮에 일어난 테러를 생중계하는 티브이, 그리고 수술대에 오른 된 나이 든 애완견이 그들의 여유 없는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든다. 과연 그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모건 프리먼, Morgan Freeman. 

80이 다된 이 노배우의 이름에서는 이상하게 자유와 박애의 냄새가 난다. <쇼생크의 탈출>이나 <우리가 꿈꾸는 기적;인빅터스>와 같은 전작들 때문일까. 아니면 ‘자유인’(Freeman)임을 굳이 자신의 핏줄에 새겨 넣은 그의 조상 덕분일까. 영화 <브루클린의 멋진 주말>에서 그가 맡은 ‘알렉스’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적 철학을 지켜내는 소신 있는 화가다. 당시만 해도 40개 주에서 불법이었던 흑백 결혼을 그녀의 아내 ‘루스’와 함께 관철시켰고 40년을 지켜왔다. 단지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단 한번 죄를 짓고도 테러리스트로 몰린 청년과 자신이 놓인 상황을 연관시킬 줄 아는 감수성을 지녔고 아내를 위해 열 살이나 먹은 강아지의 수술에 아낌없이 돈을 투자할 줄 아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하다. 나이 많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약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버릇없는 백인 청년을 단호한 눈빛으로 꾸짖는 모습도 그런 그에게 어울린다.     

 

가장 번화한 도시, 뉴욕 맨하튼에서 다소 거리를 둔 브루클린이나 헉헉거리며 계단을 올라야만 다다를 수 있는 그의 집은 그가 처해 있는 사회문화적 좌표의 장소적 상징이 아닐까. 그는 그 곳에서 이기적이고 천박한 도시와 섞이지 않고 지긋이 시선을 아래로 고정한 채 그만의 예술과 사랑을 지켜간다. 그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행복할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자유와 인류애를 동시에 느끼는 것은 너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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