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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Feb 12. 2016

젊음, 그 솔직한 감정에 대하여

<영화 ‘유스(youth)' - 파올로 소렌티노, 2015> 후기

가까이 보이는 건 미래다. 곧 닥쳐올 시련이나 희망 가득한 목표 따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그 때문에 준비하고 걱정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살아간다. 그러나 준비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까. 준비라는 건 또 얼마나 부질없는 짓일까. 노년을 준비할 수는 있지만 젊음을 준비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젊음(youth)이란 건 명멸하는 불꽃같이 예고 없이 다가와 찰나로 스쳐가는 경솔하기 그지없는 순간순간이 아닐까.

지나간 것들은 멀리 보인다. 관심이 멀어진 탓이다. 이미 나에게서 멀어진 것들에 대해 굳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상처도 받았지만 그만큼 여유도 생겼다. ‘겪어보니 그럭저럭 버틸만하더라.’ 그렇게 넘어간다. 늙고나니 자신이 엑스트라였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상처를 견뎌내며 생긴 여유랄까. 사람들은 고통에서 깨달음을 얻는 미련한 존재니까. 미련하게 얻어낸 지혜가 겨우 그런 정도다. 그것도 인생의 말미에서.   

그래도 생각이 아예 안날 수는 없다. 그 땐 왜 그랬지? 왜 나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지 않았을까하는 후회와 반성이 밀려드는 때는 역시 다가올 날들이 많지 않은 노년기다. 믿었던 자신의 과거를 부정당할 때 좌절하는 것도 이때다. 원경이었던 과거가 근경이 되고 얼마 남지 않은  미래가 불확실해지며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완고한 신념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누군가는 자발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누군가는 현실에 타협한다. 나이 들어 달라진 게 과연 무엇일까. 물론 그 때가 되면 전립선비대증 같은 걸로 하루에 몇 번 화장실에 갔는지 따위의 소소한 고민들이 곁들여지겠지. 육체라는 허접하고 때론 억울한 존재의 틀 때문에.

기쁨이든 고통이든, 불편함이든 안락함이든 모든 감정은 육체를 통해 지각된다. 육체가 없었다면 아마 무감각하게 그러나 동요 없이 평온하게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탕껍질을 비비며 박자를 맞추고 자연의 소리를 감상하며 소소한 기쁨을 즐길 수 있는 건 그나마 그 비루한 육체라도 있었기에 가능한 거 아닌가. 그러니 육체가 주는 불편함은 감수할 가치가 있는 셈이다.

사우나를 하고 마사지를 받고 일광욕을 하는 영화 속 육체 이미지들은 양지에 널어둔 동물의 거죽이나 굳지 않고 흘러내린 청동상처럼 보인다. 과연 저 안에 감정이라는 게 존재할까 싶을 만큼 남루한 신체들이 건조한 일상을 견디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탄성을 잃어버리고 중력에 의해 느슨해지기도 한다. 슬프게도,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때론 기능을 상실하기도 한다. 시간의 퇴적에 적응하며 그렇게 서서히 층을 만들어 낸 것이 사람의 육체다. 당신들이 지금 신에 가까운 완벽한 젊음을 관음하며 경탄하지만 그 또한 찰나일 뿐이다. 그 육체라는 문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설 때 진정한 젊음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느끼는 진솔한 감정. 사실, 그게 젊음이니까. 젊음은 우리의 모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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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유스(youth)' - 파올로 소렌티노, 2015>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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