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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Feb 21. 2016

한없이 부끄러운 청년들의 초상

영화 <동주(2016, 이준익)> 후기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와 송몽규의 사상과 기질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취조장면이다. 이 장면은 연극무대 같은 세트장 안에서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순사와 두 조선 청년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영화의 주제를 밀도 있게 압축해낸다. 따라서 대사는 격정적이고 표현은 연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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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순사는 윤동주와 송몽규을 각각 신문하고 나서 그들의 범죄사실이 빼곡하게 적힌 신문조서에 서명을 강요한다. 물론 신문조서는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을 주도한 두 사람을 옭아매기 위한 것이다. 송몽규는 절규하며 서명을 한다. 죄명에 기재된 만큼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반면 윤동주는 서명을 거부한다.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가벼운 형량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이 기껏 조선청년 한 사람의 서명을 받기 위해 조서를 내미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런 상황에서도 순사는 ‘(일본이) 절차를 준수하는 문명화된 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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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들어 낸 ‘법치’와 ‘절차’는 때론 본질을 왜곡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군국주의자들에게 죄수의 서명은 절차적 보장을 통한 인권의 증진이라는 법치주의 원래 취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형식적 완결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절차를 기계적으로 밟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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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이 인간을 말살하던 암흑의 시대를 흑백화면으로 그려낸다. (흑백화면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의 느낌을 살릴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스물도 채 안된 앳된 청년들이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고 실의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그들에게 우리말과 문학이라는 작은 언덕이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유학을 위해 할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 밀려든 부끄러운 마음을 시 <참회록>에 담았던 섬세하고 맑은 영혼의 시인 윤동주는 그 시절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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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조방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 한줄 시를 적어볼가 //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 보내주신 학 봉투를 받어 //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 육조방은 남의 나라 /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초의 나 //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회초의 악수. (쉽게쓰여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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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미에 건조한 음성으로 깔리는 ‘쉽게 쓰여진 시’는 그가 죽기 3년 전, 교토유학시절 쓰였다. 이역만리 고향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그것도 식민지의 청년으로 마음 속 울분을 몰래몰래 시로 옮겨 적던 시인의 마음이 영화의 장면들과 겹치면서 마음 속에 뭉클한 설움이 일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가 가능할까라는 아도르노의 회의적 물음이 있었다지만 그런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별과 바람과 하늘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는 존재가 사람이기에 우리가 지금 윤동주와 같은 맑은 영혼의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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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보면 재미있을 사실들

영화 <동주>는 저예산 영화다. 지리적 배경만 보면 간도와 교토를 아우르는 스케일의 촬영이 있어야 했겠지만 영화는 국내에서만 촬영된 걸로 보인다. 스타배우도 없다. 저예산 단편영화에 자주 얼굴을 보였던 박정민이 주연보다 더 주연 같은 ‘송몽규’를 맡아 열연한다. 윤동주 역할의 강하늘은 영화 <쎄시봉>에서도 윤동주의 육촌동생인 가수 윤형주 역을 맡았는데 그 집안과 인연이 매우 깊은 것 같다. 영화에서 윤동주의 시가 같은 대학을 다니던 일본 여인에 의해 번역되고 출간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이는 허구다. 윤동주의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해방이 되고 나서야 윤동주의 후배 정병욱과 친구 강처중 등이 감추어 보관했던 원고들을 모아 발간된다. 윤동주의 죽마고우로 알려진 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성근이 시인 ‘정지용’으로 나온다. 윤동주는 문익환과 장준하 뿐 아니라 만주군 장교출신으로 총리를 지낸 정일권과 어린시절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문익환만 잠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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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2016 이준익)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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