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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Feb 27. 2016

시계를 보지 않는 남자와 여자

영화 '남과 여'(이윤기, 2016) 후기

정통 멜로 영화라고 한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정통’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선뜻 동의할 수도 그렇다고 부인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다만 적당히 통속적이고 또 선정적이므로 ‘멜로’ 영화라는 데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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쌩판 모르는 남녀가 우연히 같은 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고 날씨가 좋지 않아(아싸아~~차편 끊겼다) 같은 곳에 하루를 묵게 되고, 넘어진 여자를 일으켜 세우며 첫 스킨십을 하게 되고, 산속 깊숙이 마치 둘만을 위해 마련된 것 같은 외딴 사우나 안에서 첫 키스를 나눈다. 이게 만나서 24시간 내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진도 빠지는 속도도 속도거니와 어수룩한 척 하는 남자나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남자의 까칠한 얼굴에 슬쩍 손을 대는 여자나 선수는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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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를 보면 솔직히 불편하다. 아니 혼란스럽다. 현실적으로는 엄연히 지탄받아 마땅한 일인데 막상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측은하고 짠하고 콧물이 팽, 눈물이 찔끔 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그들의 애정행각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동원하고 결혼생활에서 흔히 겪는 고통을 수도승의 비범한 수행인 듯 과장하는 것도 구차스럽고 이어질 듯 멀어지는 아주 전형적이고 통속적인 스토리 전개도 짜증난다. 이렇게 힘들어 죽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보는 니들이 이해하라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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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런 변명이 없어도 우리는 이해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 전도연(공유) 같이 매력적인 여자(남자)라면, 한번쯤 인생을 던질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실에서 그런 상대를 만날 일이 없기 때문에 나 역시 도덕적인 인간을 가장한 채 살아갈 뿐이다. 간통죄가 살아 있었다면 머리끄댕이 잡고 죽이네 살리네 하는 진풍경의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를 남자와 여자지만 전도연과 공유, 그들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거다. 사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정통멜로 영화에 대한 나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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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영화 <남과 여>는 조금 달랐고 많이 아팠다. 남녀 간의 흔한 이별 때문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숨 막히는 벽에 갇혀 있던 두 영혼이 그 벽 너머를 갈망하게 되는 심리적 변화의 과정에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종일 어둑어둑하고 눈보라가 치는 핀란드에서 들인 버릇이라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시간이라는 것은 사람을 정해진 대로 움직이게 하는 ‘생활로서의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두 사람은 팍팍한 삶을 살아내야 할 부모들이었고, 그러기에 서로를 알아가는 동안 점점 시간(현실)을 확인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 순간, 현실은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피해야 할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그 격정적인 사랑, 그리고 사랑이 만들어 낸 걱정이 두 사람을 현실의 벽으로 끊임없이 몰아세운다. 금방이라도 담장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이 위태롭던 두 사람을 잡아주는 건 그래도 아이들이다. 심리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남자와 여자의 아이들은 마치 두 사람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자신들의 아빠(엄마)를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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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의 연기는 언제 봐도 그렇지만 사람의 가슴을 쥐어짜게 만든다. 터져버린 울음을 감추지 못해 얼굴이 빨개지도록 흐느끼는 여자를 본적 있는가. 눈은 퉁퉁 붓고 눈알엔 실핏줄이 터지고 눈물에 젖어 코와 입주변이 발갛게 상기되어 따끔거릴 정도로 울고 난 전도연의 하얀 얼굴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만날 것처럼 가까이 스쳐지나가는 두 사람, 눈 내리는 침엽수림 사이로 난 텅 빈 국도 변에서 무심히 담배를 건네는 택시기사, 한참을 울고 나서 허공에 담배연기를 내뿜는 여자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본 어떤 멜로영화의 엔딩 씬 보다 인상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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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는 철부지 대학원생 같다. 매사에 모호하고 우유부단하다. 여자가 건넨 계란을 입으로 받아먹고 가볍게 키스를 하는 표정이나 ‘우리 돌아가지 말까’라며 대책 없이 여자를 부추길 때는 정말 저렇게 철이 없어서 어떻게 아픈 아내와 딸을 데리고 살까, 그래 어떻게 참고 살았냐 싶다. 좀 더 중후하고 깊이 있는 남자로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마 어울리지 않았겠지. 그래도 완벽한 복근과 넓은 어깨, 멀리서도 눈에 확 띠는 기럭지가 있으니 뭐 여성관객들에겐 좀 모자라는 애교나 남동생 같은 표정도 축복일테지. 공유 이 자식, 개부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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