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후기 시인의 소설 '토끼가 죽던 날' 독서후기
여백이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후기대로 그의 소설을 읽는 건 듬성듬성 구멍이 큰 철창 안 쪽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철장 안에 갇힌 서른일곱 가지 유년의 기억들을 충혈된 눈으로 바라본 기분이라고 할까요. 소설 <토끼가 죽던 날>을 읽고 난 후의 소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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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노란 표지 안에 담긴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음울합니다. 아직 몇 년 살아보지도 않은 꼬마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라고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첫 문장부터 토끼의 죽음을 걱정하는 소년이 등장하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소년의 주변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심지어 동물들도 잔혹하게 죽어갑니다. 강아지가 죽고, 돼지가 죽고, 토끼가 죽습니다. 그 죽음의 이야기들이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평온하여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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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평택이라는 공간은 나에겐 너무나 낯설어 마치 화성의 어느 한 모퉁이에 있던 사막의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비릿한 갯벌이 가까이 있고 미군기지와 비행장과 논밭을 낀 마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젖은 이파리들처럼 비스듬히 스러진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아이는 이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죽음의 공간에서 세상을 배워갑니다. 그가 그리워하는 존재들은 토끼 굴 속에 깊이 숨어들어 이제 여백과 같이 느껴질 지경입니다. 그는 아직 토끼굴 앞에서 씀바귀를 든 채 그 어린 시절을 가득 채워주었던 그리운 존재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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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가 죽거나 사라지듯 사람은 죽거나 혹은 살아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작가에게 산다는 건 “죽음의 둘레만 빙빙 돌다 가는 일”(詩 「동백, 대신쓰는 투병기」 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박후기 작가가 좁고 어두운 토끼굴 안에서도 “명멸하는 한 줄기 빛을 찾아내”(詩「시인의 손」 中길) 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든 소설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