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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Apr 15. 2016

상담실에서

꽃이 피었더라구요. 다시 시작인거죠.

상담실을 먼저 나서는 내 귀언저리로 그녀의 음성이 거미줄처럼 따라온다. 아마 그녀는 여름이 오기 전 다시 나타날 것이다. 때로는 해결책이 없는 민원이 있기 마련이다. 관공서의 상담창구는 그런 답안나오는 고충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비빌 수 있는 언덕이다.

그녀 역시 법원으로, 검찰청으로, 경찰서로, 법률구조공단으로 일삼아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말이 민원이지 해결책이 없다는 점에서 그냥 하소연에 가깝다. 어쨌거나 주구장창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재미없는 장편 에스에프 영화 한편을 억지로 보고난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아주 짧게 요약하자면,

엄마가 알고보니 친모가 아니었고, 이웃집에 사는 남자와 엄마 사이에 아이가 생겼고, 그 남자는 프리섹스주의자고, 그 아이를 아들인줄 알고 키웠는데 교회에서 살해되었고, 살해장면을 목격했지만 지금은 멀쩡히 부활하여 군대에 있고, 목사의 염력에 의해 장애인이 되었고, 장애를 이유로 차별을 당했고, 억울해서 민원을 제기해도 대통령이 방해를 하고, 집에 가면 죽었던 아버지가 살아나 있고, 모든 것은 순환하고, 그래서 계속 진정도 내고 고소장도 낸다는 것이다.

성의 없게 듣는 것 같으면 언성이 높아지고 의문을 제기하면 신경질적이 되어버린다. 곧 금을 따라 갈라질 것 같은 목소리가 '라' 음을 찍고 내려올 때, 거기에 맞춰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눈을 맞추어주면 그녀는 다시 시를 읊조리듯 낮은 음성으로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의 말대로 모든건 순환인지도 모른다. 차분해진 그녀가 모든 고민이 해소된 것 처럼 돌아갔다고해도 다시 찾아오는데 석달이 채 걸리지 않을텐데. 이런 패턴대로라면 일년에 세번쯤 그녀를 더 볼테고, 그러면 코앞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있겠지.

물론 그 때가 되어도 가난한 정신질환자를 위한 무료진료나 기초생활수급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구청 사회복지 공무원은 소관부서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전화를 돌릴 것이다. 꽃이 열번을 피었다 지는 동안, 세상은 단 한번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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