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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Apr 28. 2016

우리에게 약 복용설명서는 무엇인가

저는 정치적이지 않아요. 이념과 사상은 동네 도서관에 살고 있는 좀벌레의 일종이 아닌가요? 그렇게 촘촘한 글로 사람들의 눈을 피곤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저 단순한 사실만을 전달하려 할 뿐이죠. 실제로 저는 우르소데옥시콜산이나 티아민질산염을 함유하고 있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것들의 성분을 정확하게 알고 있죠. 저는 음모에 휩싸이고 싶은 생각도 없고, 스캔들로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아요. 그저 수치까지 정확하게 식약청 인정 타르 색소가 5mg들어있다는 사실을 전달할 뿐이예요. 사람들은 저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하지만, 눈길한 번 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죠. 저는 그저 작고 네모난 종이상자 속에 구겨진채 하루종일 잠자는 것이 맘 편해요. 가끔 황색의 내용물이 담긴 황록색 암록색의 장방형 연질캡슐을 찾는 손가락이 더듬더듬 날 만지기도 하지만, 그런 정도로 성적 수치심을 느낄만큼 민감하진 않아요. 저는 당신을 성희롱신고센터에 고발하고 싶지 않답니다. 갈등을 유발하는 건 저의 몫이 아니니까요. 저는 많이 길들여진 편이랍니다. 저는 실제로 만성 간질환의 간기능 호전이나 온몸권태, 소화불량, 식욕부진, 육체피로에 도움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그건 제 역할이 아니예요. 저는 그저 여러분들의 의심을 덜어드리기 위해 세상에 존재할 뿐이예요. 다른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지요. 그러나 정작 저 자신을 증명하지는 못해죠. 저는 일회용이고 버려질 운명을 타고 났지요. 저를 위해 증거를 제시해주실분이 있을까요. 저를 설명해주실 분도 좋아요. 그렇다면 그건 설명서를 위한 설명서쯤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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