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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May 05. 2016

<탐정 홍길동>새로운 것인가, 익숙한 것들의 조합인가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 조성희)' 후기>

홍길동은 모든 관공서의 각종 서식에 단골 민원인으로 등장하는 이름이다. 계약서의 샘플이나 고소장, 도로점용허가, 영업신고서 양식은 물론이고 부동산의 임대차계약서 샘플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성씨 가운데 1%도 되지 않는 홍씨 가문으로서는 무척 놀라운 성과를 거둔 셈이다. 번식능력에 있어 가장 우월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김, 이, 박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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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이 근대화 이후 각종 문서양식의 서명자의 표본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최초의 대중소설(국문으로 썼다는 점에서) ‘홍길동전’의 주인공 이름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대중에게 사랑을 받은 소설이나 전래동화의 주인공이 홍길동만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세로야 이순신이나 유관순 같은 위인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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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이 관공서에서 이만한 대우를 받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탐욕스러운 탐관오리들을 물리치고 약하고 궁핍했던 대중들을 대변하며, 부패한 구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했던 그의 정의로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적같이 적어놓은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관공서에서 자주 쓰는 서식에 가장 반정부적이었던 도적의 이름을 굳이 예시로 사용할 리가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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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은 홍길동의 이미지와 이름만 차용한 관공서 서식같이 거대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 캐릭터와 그 구도만 차용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홍길동’과 전혀 무관하다. 부계질서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던 ‘홍길동’과 달리 영화 속 탐정 ‘홍길동’은 거부인 양아버지의 든든한 후원 속에서 사설탐정으로 자랐고 그의 배후에는 막대한 자금력을 갖춘 흥신소 활빈당이 있다. 거악 척결을 위한 명분과 조건이 다 갖춰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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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복수에 나선 홍길동과 죄책감 때문에 늙고 병들어가는 원수의 안타까운 사연, 홍길동의 잃어버린 유년과 악당과의 복잡한 인연, 정 많고 선량한 주민들을 수탈하면서 모든 권력의 배후가 되어버린 악당의 음모, 그리고 영화 말미를 장식하는 반전과 총격전, 이 모든 것이 예정된 소설 한편을 읽는 것처럼 순조롭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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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있는 캐릭터, 탄탄한 스토리와 속도감 있는 전개, 만화를 보는 것 같이 입체적인 카메라 구도, CG로 구현된 몽환적인 색감과 화면구성, 영국의 뒷골목이나 미 서부의 광활한 고속도로를 연상케 하는 이국적 세트장은 홍길동이라는 토속적이고 전형적인 캐릭터를 고독하고 치밀한, 그러나 귀엽고 엉뚱한 비전형적 영웅 캐릭터로 바꿔놓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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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 영화는 <샤일록 홈즈> 시리즈 중 한 편을 우리 배우들로 리메이크 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저 ‘강원도’라는 이름만 차용한 몽환적 공간에서 할리우드 물을 많이 먹고 자란, ‘홍길동’이라는 이름만 빌린, 국적불명의 사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물론 이러한 설정들이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영화적 시도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지나쳐 몰입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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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적으로도 영화는 복잡하다. 만화, 느와르, 액션, 로드무비, 환타지 어드벤쳐 어떤 것으로도 완전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담겨있다. 예쁘고 탐나는 볼거리들이 잘 정리된 진열대를 지나온 기분이 딱 이럴 것 같다. 뭔가 내 것이 아니어서 눈으로만 보게 되는, 남의 물건으로 꾸며진 진열대 말이다. 물론 새로운 영상을 보여주겠다는 이 영화의 시도는 대중에게 충분히 통할지도 모른다. 스타일이 분명하고 캐틱터 또한 근래 한국영화 중에서는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조선명탐정> 시리즈 보단 낫다. <늑대소년>을 흥행시켰던 감독의 감수성과 세련된 감각이 살아 있다. 흥행에도 성공할 것이다. 그럼에도 <샤일록 홈즈>나 <배트맨> 못지않은 시리즈 영화의 탄생이 될지, 아니면 고만고만한 아류에 그칠지는 단언할 수 없다.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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