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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May 11. 2016

영화 <곡성> 후기

두려움과 의심이 낳은 살육전

욕 나오는 영화다. 두 시간 넘게 앉아 몇 번이나 자세를 바꿔야 했다. 움츠러들었다가 허리를 곧추 세워보기도 하고 턱을 괴었다가 다리를 꼬았다가 별 짓을 다 한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머리가 다 아팠다.

“응? 뭐야?”

영화를 보느라 힘들었던 나 만큼이나 지친 표정을 한 곽도원의 마지막 씬에 이어 갑자기 엔딩크레딧이 등장하자 여기저기서 관객들이 내뱉은 소리다. 두시간이 넘는 대치 끝에 겨우 풀려난 인질들 같이 넋이 빠진 모습들이었다. 관객들은 나홍진이라는 용의주도한 이야기꾼이 던져놓은 미끼를 덥썩 물었던 것이다. 무려 156분 동안 말이다.

사실 영화 <황해>를 보지 않았다. 끔찍한 장면 때문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본 <추격자>의 적나라한 장면들 때문에 괴로운 밤을 보낸 경험 때문에 나홍진이라는 이름에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호기심이 발동했다. 15세 관람가 등급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 같다. 겁대가리를 상실한거지. 감히 나홍진을 뭘로보고.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영화는 누가복음 24장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 짧은 문장에 나오는 '두려움'과 '의심'은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사람들은 낯선 존재에 대해, 실체가 모호한 대상에 대해, 규명되지 않은 현상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의심'이라는 심리상태도 마찬가지다. 익숙하지 않은 것,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 경험해보지 않은 것,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대상은 당연히 믿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종교를 찾는다. 종교는 가장 큰 두려움이자 가장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를 맹신해야하는 왜곡된 신념체계 아닌가. 영화는 이 이율배반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관객들을 시험에 빠뜨린다. 과연 악마는 누구인가. 악마는 실체인가 초자연적 현상인가.

영화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하는 주인공 종구(곽도원)의 시선을 따라간다. 종구는 덩치만 커다랗고 기집애같이 겁이 많은 사내였지만 자식의 목숨이 달린 상황에 놓이자 급격히 달라진다. 그러나 그가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폭력뿐. 폭력은 또 다른 두려움의 원인이 되고 영화는 끝을 알수 없는 폭력과 살육의 전쟁터 안으로 관객을 끌고 간다.

종구의 험난한 투쟁을 상징하듯 영화 속 '곡성'은 어둡고 음습하다. 비가 그칠줄 모르고 천둥번개가 번뜩이며 하늘엔 까마귀가 가득하다. 피가 낭자하고 어디선가 묵직한 고깃덩어리가 머리 위로 툭 하고 떨어질 것만 같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배경 때문인지 좀비와의 대낮 격투신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흠으로 보였다.

반면, 기괴한 장면들이 짜맞춘듯 이어지다가 중간에 펼쳐지는 황정민의 굿판은 압권이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까지 신내림을 받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몇 장면 등장하진 않지만 아주 강렬한 인상을 준 천우희는 대체 불가능한 여배우다.

감독의 힘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을 긴장의 독 안에 가두어 두면서도 끊임 없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데 있지 않을까. 이걸 연출력이라고 한다면 나홍진은 몇 안되는 훌륭한 연출력을 갖춘 감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후기를 쓰면서도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러다가 새벽닭이 세번 울리기 전까지 잠들지 못할지도 모른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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