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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n 12. 2016

영화 <정글북> 후기

팍스 아메리카나의 문화전략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거쳐 실사로 만들어진 <정글북>을 보고나서 조만간 영화배우라는 직업마저 없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알파고 충격 이후 향후 20년 안에 사라질 직업 따위의 기사에서도 ‘영화배우’가 포함되지는 않았는데 <정글북>에 등장하는 짐승의 표정이 무척 자연스럽고 정밀하여 그런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정글북>은 ‘Pax Americana'(미국에 의한 평화)라는 메시지를 주입시키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 ’정글의 법칙‘을 읊어대는 모글리에게 발루(곰)는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니가 읊어대는 건 노래(문화)가 아니라 세뇌”라고 지적한다. 모글리와 늑대 무리들이 틈만 나면 외는 ’정글의 법칙‘은 무리안의 결속을 강화하고 외부로부터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정신무장이니, 꿀과 휴식을 사랑하고 노래를 좋아하는 곰 발루에게 모글리의 ’정글의 법칙‘이 마음에 들 리 없다. 마찬가지로 <정글북>은 영화라는 문화적 양식을 빌어 ‘Pax Americana'를 ‘세뇌’한다.


원래 <정글북>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러디어드 키플링의 소설이 원작이다. 그는 미국에 머물던 시절 정글북을 썼는데 다른 작품을 통해 백인우월주의자 혹은 전쟁옹호자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누구든 정글북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동화, 소설 등 다양한 장르로 접해봤을 것이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면서 꽤 많이 봤던 스토리가 <정글북>이다. 모글리가 인간들의 마을에서 불을 가지고와 정글의 평화를 이룬다는 이야기 틀에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인간에 의한 세계지배, 혹은 백인에 의한 제3세계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우회적 상상력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Joseph Rudyard Kipling  생몰년 : 1865년 12월 30일 - 1936년 1월 18일  

그런데 이번 실사판 <정글북>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영화 <정글북>은 원작의 줄거리와 약간 다르다. 비슷한 에피소드의 배치에 변화를 주었고 군더더기는 생략했다. 그렇게 단순화된 선악구도는 오히려 현재의 국제정세 속에서 미국이 자임한 세계경찰로서의 역할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표독스러운 호랑이 시어칸은 21세기 초 미국에게 ‘악의축’으로 지명되었던 몇몇 아랍 국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모글리의 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이고 결국 모글리의 손에 죽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모글리를 납치하여 “불을 가져오라. 불이 있으면 인간처럼 살아보고 싶다.”며 욕망을 드러내는 오랑우탄 ‘킹 루이’는 북한을 연상케 한다. 탐욕스러운 킹 루이에게 불이 공포의 대상이자 욕망을 실현하는 열쇠인 것처럼 천방지축 김정은에겐 ‘핵’이 그런 것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영화 속에서 ‘킹 루이’ 역시 자신이 기거하던 거대한 성에 깔려 죽는다.



뭐 미국의 자본으로 만들어낸 영화가 미국적 상상력을 기초로 한다고 하여 잘못되었다고 할 건 아니다. 기술의 발전이 이렇게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 그저 놀라운 영화미학의 탄생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실사판 <정글북>에서 미국의 문화지배를 보는 기분은 썩 유쾌하진 않았다. 무력에 의한 평화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현실적인 실리주의보다 평화의 원래 의미를 먼저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문화영역에서만큼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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