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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n 13. 2016

분홍색 우산을 든 할머니는 왜 인천으로 갔던걸까

인천까지 간다는 할머니. 옆 자리에 잠시 머물다 간 또 다른 할머니와 몇마디를 나누더니 이내 입을 다문다. 다시 옆 자리엔 또 다른 노인이 자리잡고, 할머니는 노인을 피해 가장자리로 옮겨 앉는다. 눈치가 없어 보이는 등산복바지에 조끼차림을 한 노인은 할머니를 흘낏거리며 바라보다가 말을 건다. 어디 가시우?

할머니는 귀찮은 표정을 짓는다. 아까 또 다른 할머니와 잠시 수다를 떨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노인이 다시 채근하듯 묻는다. 어디 가시우?

인천가요. 왜요? 왜 남이 어딜 가든 말든.

내뱉듯 퉁명을 떠는 할머니에게 노인은 섭섭한 표정이 되어 말을 머뭇거린다. 뭔가 더 이어갈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지 노인은 슬그머니 눈을 감는다. 민망함을 피하는데는 그저 눈을 감는게 최고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그 장면을 관찰하던 나에게 자리를 권한다. 내가 가운데 앉으면 노인들이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짐작했다.

노약자석이잖아요.

내 완곡한 거절에 슬며시 웃음을 보이던 할머니는 잠시 후 칠인용 의자에 자리가 나자 다시 나를 쳐다보며 가지고 있던 우산으로 빈자리를 가리킨다. 내가 빙그레 웃음을 지어보이자 할머니도 빙긋 웃는다. 손주 생각이 난 걸까. 빈 자리를 알려주는 사람은 낯선 할머니들 뿐이다.

나는 할머니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약간 떨어진 자리 기둥 옆으로 기대 선다. 할머니는 눈을 감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딱히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진 않다. 그저 무료하게 바닥을 응시하다 가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는 행동을 반복할 뿐이다.

두어 정거장 쯤 지났을 땐가. 할머니는 다시 우산을 들고 앞자리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한 처자를 부른다. 놀란 처자가 뒤를 돌아 할머니를 바라보자 자기 옆자리로 오라고 손짓한다. 처자가 엉겁결에 할머니 옆자리로 가서 자세를 낮추고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하자 자짜고짜 치맛자락을 당겨 무언가를 떼어낸다. 할머니 손에 작은 패치로 보이는 물체가 딸려온다. 처자의 원피스 뒷부분에 그녀도 모르는 이물질이 붙어있었으리라. 처자가 당황하며 웃는다.

제가 할게요.

그래도 할머니는 멈추지 않는다. 꼬깃꼬깃한 휴지조각을 자신의 가방에서 꺼내 처자의 치마를 싹싹 닦아낸다. 마치 귀하게 키우는 손주딸을 목욕시키던 우리 외할머니를 연상케하는 손길이다. 치맛자락을 맡기고 있던 처자가 정말 고마운 듯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할머니는 슬쩍 미소만 짓더니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간다.

그녀에게 지하철은 세상과 맞닿은 공간이다. 지하철 안에서 손주를 만나고 손녀딸을 살핀다. 바닥을 쳐다보고 있다가 가끔 창밖도 응시한다. 눈치없는 노인들이 귀찮게 하지만 할머니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들 출근하느라 바쁜 지하철 1호선. 어느 해인지 무척 더웠던 여름 아침. 할머니는 그렇게 인천으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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