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두 어깨 위에 전 국민의 기대를 얹고 경기를 뛰었을 김연아. 그녀는 빙판 위에 서면 자신이 있는 그 빙판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러나버린 듯 음악과 자신만 남는다고 했다. 수면 아래의 바쁜 발짓은 보이지 않은 채 고고한 자태로 호수를 누비는 한 마리의 백조처럼 긴장하지 않은 듯 우아한 몸짓으로 경기를 풀어나가던 그녀였지만, 모든 과제가 끝난 순간 이제까지의 다른 경기에서와는 다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긴장하며 중계방송을 보던 나도 '숙제 끝~! 고생했다, 이제 그 무엇이든 니 마음대로 다 해!' 하는 마음에 눈물이 따라 흘렀었다. 정작 그녀는 다른 복합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르지만 링크장을 빠져나오며 당시 코치였던 브라운 오서에게 자신도 모르게 빵 터졌다는 제스처를 보였던 걸로 보아 신경 쓰지 말자 했어도 그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지가 느껴져 안쓰러운 마음이었다. 평소 대인배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쿨한 성격의 그녀라도 지구가 통째로 그녀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한 분위기에서 마냥 평온할 수만은 없는 법. 부담이란, 결과가 좋을 때야 큰 환호와 축복과 스스로의 성취로 돌아오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의 절망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오해 마세요. 전 연아의 팬이랍니다. @ 네이버 연합뉴스, 뉴시스 포토 뉴스
때로 부담감은동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보는 이가 있을 때 더 잘 해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라 혼자였다면 금세 포기하거나 대충 하고 넘어갔을 일도 부담이 지어졌을 때 한 발 더 나아가고 한 번 더 해보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도 그랬다.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 그것이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을 추구하려 애쓰게 했다. 입시 학원 강사로서 고3을 대하는 내 모습이란 집안일과 아이케어, 거기다 수업을 하는 시간 외에 잠을 줄여 수능 킬러 문항을 파고 있는 것이었다. 고2라고 다르진 않다. 어차피 학교 내신시험 1등급, 혹은 1등을 위해서는 같은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부담감은 고2와 고3을 가른다. 고2에게는 아직 1년이라는 시간이 있지만 고3은 3월 모의고사든 9월 모의고사든 그 긴장감이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고3이 되고 하루, 한 달 시간이 가면 아이들은 밴쿠버의 김연아가 된다. 가족들의 기대와 부담을 안고 혹은 스스로의 책임감으로 자신이 지금 최선을 다 하는 것인지, 그러고 있다고 믿고 싶은 하루를 사는 것인지 헷갈리는 날들을 이어간다. 나 또한 그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자면 다해가는 수명이 눈 앞에서 카운트다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3.6.9월에 있는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면 수업 전 그날의 시험지도 다운 받아 훑어보고 오후 6시가 되면 등급 컷 점수와 시험을 분석한 대형 학원이나 일타강사(1등 스타 강사)의 영상도 확인한다. 내가 고3인 것 처럼.
그렇게 지낸 시간 덕에 감사하게도 큰 실패는 없었고 아이들이 얻는 성취 덕에 나 또한 보람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대신 몸이 망가졌고 하나뿐인 딸아이와 마음만큼 시간을 보내주지 못함과 해주고픈 것들을 함께 해주지 못함에 미안함이 커져갔다. 늦은 시각 학원에 오는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나면 이미 밤 10시가 넘어가지만 아이는 유치원에 이어 초등 저학년이 되어서도 그 시각까지 엄마를 기다리느라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엄마 껌딱지였던 이유인지 신생아 때부터 해왔던 잠자리 독서 때문인지, 수업이 끝나고 부랴부랴 달려와 책을 읽어주고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나면 바로 잠이 드는 아이를 보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식의 생각이 들었기에 수업을 줄여 조금 더 일찍 퇴근을 하기도 했지만 집에 오면 무엇하나, 엄마란 사람은 아이 얼굴이 아니라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당연한 수순으로 아이의 체력은 줄고 잔병치레도 많아졌다. 돈도 커리어도 중요하지만 순간을 지나면 다시 오지 않는 아이의 어린 시절과 건강은 앞의 두 가지를 포기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이제부터는 중등과 고등의 현실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둘의 차이는 부담감이 가장 큰 것이겠지만 그것이 학생들의 것인지 엄마들의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중학생은 중학과정 3년간의 수업 내용을 3년 동안 배우면 된다. 고등학생은 그랬다간 원하는 대학교란 저 멀리 꿈나라로 가고 말 것이다. 고등학생은 3년간의 내용을 2년 만에 끝내야 한다. 수능 전날까지 진도를 나가고 다음 날 시험을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바쁘다. 지금의 엄마들이 고등학생이던 시절에 1년 동안 배우던 내용을 한 학기에 끝내야 하는 건 당연지사. 수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이라면 1학년 첫 학기 첫 시험부터 성적 관리에 힘써야 한다.
이런 아이들의 학습 부담을 줄이기 위해 2015년 교육과정부터는 2009년 교육과정에 비해 너무 어렵거나 내용이 복잡한 것은 상당 부분 뺐다. 발표 당시 이공계 분야의 대학 교수들은 '그럼 그 똥멍청이들을 데리고 뭘 하라는 거냐'고 반발하기도 했지만 그 방향은 교육과정이 바뀌어도 이어지고 있다. 교육을 통해 창의 융합형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 목적이니 사족 같은 내용보다 큰 틀에서 통합적 판단을 하고 창의적 인재로 길러내려면 그 방향이 맞기는 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공대를 졸업한 나로서도 고등과정 때 이과 반에서 보충수업까지 하면 하루 4시간을 공식적인 수학 수업에 썼음에도 공업 수학은 또 다른 세계였다. 한 문제 푸는데 심하면 가로로 긴 칠판 전체를 다 쓴다면 오버(?)일까.
중앙일보 2024.01.14 [세컷칼럼]
무튼, 고등 수학의 난이도와 선택과목에 대한 내용은 워낙 언론에서도 떠들어대서 많이들 알고 있는 이슈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자세한 예의 하나로 중학교 과학 중 지구과학 파트에서 지구의 모양이 둥글다는 증거를 약 10가지씩 배우던 것이 아예 빠졌고,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현상으로 4~5가지를 배우던 것을 두 가지만 배운다. 그마저도 2022년 교육과정부터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 현상의 자세한 내용은 빼고 우주에서 보는 관점으로만 잠깐 설명하고 넘어갈 예정이란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교육과정에서는 빼놓고 시험에는 출제가 된다는 것이다. 빠진 내용이 주가 되지는 않으나 보기나 다른 선지에 나오다 보니 배경 지식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수업 시수가 정해져 있기에 학교에서는 주어진 진도를 나가기에도 벅차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거나 아예 거론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 국가교육과정 정보센터
상황이 이렇다면 선택은 둘 중 하나이다. 초등 때부터 비문학 부분의 배경지식을 많이 쌓아 두거나 필요할 때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 오랜 시간 해 온 일이지만 몇 년 있으면 이런 상황을 마주할 한 아이의 엄마로서 씁쓸한 기분이다. 더 한 것도 있다. 고등학교 반배치고사를 고1 1년 동안 배울 수학 내용으로 보기도 한다. 말이나 되느냐 말이다. 한 걸음 더 나가보자면, 고1 시험지의 28문제 중 약 20문제가 고2 내용인 경우도 있다. 앞에서 열거한 것들이 몇몇 특별하고 싶은 학교나 선생님의 경우라 쳐도, 고1 시험을 위해 고2 내용 혹은 수능 문제까지 풀며 준비해야 1등급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이 혼자 공교육만으로는 상위권에 들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또한, 과목을 막론하고 그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단답형의 주관식 문제였던 것이 지금은 서술형 문제로 바뀌었다. 바뀐 지는 한참 되었으나 날이 갈수록 문제당 배점이 끝을 모르고 높아지고 있다. 객관식의 20문항을 다 맞혀도 서술형의 배점 5점 혹은 7점, 그도 아니면 10점짜리 문제 한 두 개만 틀려도 점수는, 슬퍼서 글을 잇지 못하겠다.(울던 아이들이 생각나서) 서술형의 비율이높아지는 방향은 다양한 관점에서 그 취지가 좋다고 생각한다. 주입식으로 앵무새처럼 외우는 지식이 아닌 통합적 사고와 논리적 서술 능력이 갈수록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으니. 교육부에서도 서술형의 비율을 높이라는 방안이 결정된 만큼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의 글쓰기 실력과 그 못지않게 글씨체 또한 중요한 내용이 될 것 같다. 억울하게 점수를 잃었다 주장하는 아이들의 답안을 보면 부정어와 긍정어의 사용에 오류가 있어 서술형 답안을 채점하시는 선생님의 입장에서 아이의 의도를 오해하시는 경우도 있고, 말로 물어보면 잘 설명하는 내용을 글로 표현함에 있어 충분히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무엇보다 숫자나 글씨가 바르지 않아 아이가 쓴 것과 다르게 보고 틀리게 채점하는 경우 가장 억울해한다.
논설문도 아닌 것이 에세이도 아닌 것 같은데, 주저리주저리 경험을 늘어놓다 보니 드는 생각은 요즘 아이들 참 바쁘다는 것이다. 고득점을 노린다면 선행을 해야 하고, 학교 공부 외에도 문해력을 기른다고 어릴 때부터 많은 독서와 글쓰기 연습도 해야 한다. 글씨도 바르면 금상첨화라니 전보다 연필을 잡는 방법이나 주로 사용하는 손, 글씨체에 조금은 관대해진 문화 속에서 살짝 꼰대스럽지만 그 바쁜 아이들을 챙기기 위해 엄마들이 더 바빠져야 하는 것 같다. 예전 엄마들의 역할은 그저 아이들을 잘 먹이고 입히고, 조금 더 나가자면 정서적인 부분을 사랑으로 채워주면 되었다면 요즘은 엄마들에게 슈퍼우먼, 슈퍼맘이 되길 요구하는 시대인 듯싶다. 많고 많은 교육정보는 다 알아야 할 것 같고, 그중에서 내 아이에게 맞는 정보를 똑똑하게 골라야 하는 지혜를 강요당하는 것 같다. 아이 수는 줄었는데 학교에 챙겨서 보내야 할 서류들은 더 많아졌고, 학원이든 병원이든 갈 곳은 많아졌지만 어느 한 곳 쉽게 데리고 가질 못한다.
하나 혹은 둘 정도인 아이들을 키우는데 드는 돈으로 전 같으면 다섯도 키울 것 같다. 기본적인 양육을 위해 드는 돈 외에 교육비는 세계적으로도 따라올 나라가 없을 정도다. 여기서 반전은 자신의 아이들을 또래보다 앞서 나가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있도록 혹은 제 때에 알아야 할 내용을 알게 하려는 것이 학원을 보내는 이유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20년 가까이 지켜본 결과 예전에 비해 대체로 아이들의 문해력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전교 1등인 아이도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보통의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낮아지는 출생률 따라 학원 폐업률이 높음에도 어느 쪽에서는 우후죽순 생겨나기도 하여 하나의 동에만 50개가 넘는 수학 학원이 있기도 하는 것 같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중등 수학이나 과학 단과 수업은 25만 원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기다 심화 학습까지 하면 수업료는 더 올라가는데 고등은 부르는 게 값이다. 고2가 되면 선택과목이 추가되기에 그 특성상 강사들도 많지 않아 기본 35만 원부터이고 그 두 배 이상인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그렇다면 아이 하나당 영어, 수학만 들어도 중등이면 기본 50만 원인데 고등이 면 60~70만 원은 그냥 나가는 돈이다. 와중에 나와 함께 했던 아이들의 평균을 보면 영어, 수학만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주요 두 과목 외에 과학과 논술정도는 하고 아직 중학생이라 예체능을 추가로 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등학생이 되면 시간과 경제적 부담이 있기에 영어, 수학, 과학 외엔 인강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과외라면 평균적으로 학원비의 1.5배 정도로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대충 아이 한 명을 가르치는데 드는 사교육 비용으로 월 100만 원은 우습게 나가는데 이 금액이 부담스럽지 않은 가정이 얼마나 될까.물론 지방의 이야기라 수도권은 규모 자체가 다를 거라 짐작은 한다.
내가 살아온 시절과 지금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다르다고 하는데, AI가 많은 부분을 감당할 텐데도, 어쩌면 그렇기에 갈수록 아이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더 많아지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엄마의 역할에 더해 아이들이 길러야 할 그 많은 능력들을 챙겨줘야 하는 것이 의무인 것 같은 요즘 엄마들, 그녀들의 부담감을 알기에 오늘도 비싼 수업료를 생각하며 나는 또 문제를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