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열심히 하던 때였지만 스스로 흡족하게 잘하던 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면단위에 있던 중학교라 시내의 다른 학교들보다 더 많은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선생님들의 의지였으리라. 중3. 고등학교 입학도 전에 학기 중에는 야간 자율학습을, 방학중에는 보충수업과 말만 자율인 타율학습을 했었다. 이미 입이 나올 대로 나온 우리에게 하늘은 아니 선생님들은 무심하시기도 하지, 어느 날부턴 가는 방학중 자율학습 시간을 늘리겠다는 것이 아닌가. 맙소사. 대체 왜??! 그럼 방학은 뭐 하러 한 거지? 아예 야간 자율학습까지 하지 그래? 아이들은 툭 건드리면 빵 하고 터져 버릴 듯 퉁퉁 불어있었다.
꾸역꾸역 학교를 다니던 지루한 어느 날, 친구 P가 말했다.
"너 아니지?"
"뭘?"
"아닐 거야."
"대체 뭘?"
아이들이 나를 두고 수군거리다 못해 급기야 p에게도 나와 어울리지 말라고 했단다. 방학 중 자율학습 시간이 늘어난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 기가 막혀서. 더 어이 털리는 건 우리 엄마가 학교에 민원을 넣었다고 했단다. 엥? 평생 공부하라 소리 한 번 안 하는 우리 엄마가 학교에 민원을? 말도 안 돼. 그럴만한 일이라도 있어야 믿지. 풉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나 아냐, 우리 엄만 더더욱 아니고."
"그렇지? 그럼 네가 해명해, 괜히 오해받지 말고"
"내가 아니면 됐지, 무슨 해명씩이나. 됐어"
별 일 아니라 생각하던 내 뒤통수가 날이 갈수록 따가워진다. 어라? 친한 친구들도 은근슬쩍 피하는 눈치네? 곰이 진짜 미련한지는 모르겠지만 곰처럼 살던 며칠 사이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이 날 왕따시키고 있었다. 어... 진짜 나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하지? 같은 교실 안에서 내 머리 위에만 먹구름이 낀 듯, 그 구름에서 내리는 비를 맞으면 당장에라도 피부가 녹아버리기라도 하는 듯, 내 근처엔 두 명의 친구를 제외하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두 명의 친구가 참 많이 고마울 일이었다. 반 아이들 대부분이 누군가 시작한 없는 말을 덮어놓고 믿으며 단체로 눈총을 쏘거나 반대로 투명인간 취급을 하던 중에 나를 믿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땐 어렸던지라 고마운 마음은 구석에 두고 심장은 화부터 내는데 몸은 꼼짝도 못 했다. 가만히 있던 내게 이런 누명을 씌우는데 한 발짝이라도 움직였다간 또 어떤 말을 만들어 낼지. 눈빛 하나, 손 짓 하나에 죄목을 늘려 결국엔 나를 화형대 위에 올려놓을 것만 같았다. 점점 굳어가는 시멘트 같던 내게 P는 재촉했다. 더 가만히 있다간 정말 가마니가 되겠다며.
배고픈지 힘이 없어 보인다며 7살 아이가 가져다준 꿀에서 마지막을 맞이 한 꿀벌. 이미 수명이 다한 듯 보였지만 아이의 마음에 지켜보고 있었다. 저 꿀벌은 마지막이 행복했을까.
진학실에는 담임과 옆 반 담임선생님이 함께 계셨다. 공손한 인사 뒤 용건을 말씀드려야 하는 차, 눈물부터 터져버렸다.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던 아이가 불쑥 찾아와 울고 있으니 선생님도 당황하셨을 터. 잠깐 사이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 얼어계시다 다시 플레이가 된 듯 일어나 휴지를 뽑아주시며 나를 달래셨다. 그럼에도, 쉽게 멈추질 못하고 끅끅대고 있는 나를 보시다 안 되겠는지 P를 부르셨다. P를 통해 상황을 전해 들으신 두 선생님들은 그제야 울음을 그친 나를 돌려보내신 뒤 우리 담임이 아닌 옆 반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반 교실에 들어오셨다.
"얘들아,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반 학부모님의 민원이었어. 중3인데 비 온다고 일찍 끝내주고, 많이 더운 날이라고 보충 줄이고. 그러니 애가 집에 오면 놀기만 한다고 학교에 더 붙잡아 두라고 하신 거. 그래서 자율학습 시간 늘어난 거야. 괜히 가만히 있는 애 잡지 말고 이제 그만해.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얼마나 억울하겠나"
아무리 시골 학교라지만 방학임에도 등교해야 하는 얄궂은 인생을 온몸으로 한탄하며 꿈틀대던 아침, 좀처럼 우리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부모님의 크고 거친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결국 점심으로 도시락 대신 용돈을 쥐어주던 엄마.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려다 말고 누가 부르는 소리에 복도 쪽 창을 보니 서계셨다. 도시락을 못 싸주신 게 마음에 걸렸던지 짬뽕과 함께 중국집 아저씨를 따라 잠시 들르셨던 것. 한 마디 말씀도 없이 아저씨가 갖다 주시는 짬뽕을 먹으라며 눈짓만 하고 가셨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니 내게 점심이 전달되는지 확인하고 가셨던 것을, 자율학습이 늘어난 불만을 터트릴 구실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옆 반 담임선생님의 강한 입김에 내 머리 위에만 있던 먹구름은 날아갔지만 내 심장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고 이젠 구름도 없는데 얼굴엔 계속 비가 내렸다. 지금 같으면 학교폭력위원회를 열 일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이슈가 될 만큼 크게 드러내놓고 설치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분명히, 없는 말을 만든 사람도 있을 테고 일을 그렇게 만든데 일조한 주동자도 있을 터라 담임선생님은 반장을 시작으로 몇몇 아이들과 상담을 하셨다. 한바탕 여기저기 울며불며 비바람이 지나고 반 아이들이 사과를 했음에도 속마음에 내리는 비는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었다.
'너 입속에 곰팡이 안 피니?'
엄마가 말씀하실 정도로 말이 없던 아이였다. 그나마 중학생이 되며 늘었지만 기어이 이런 일이 일어나고서야 바뀔 필요성을 느끼는 느린 아이기도 했나 보다.
쓸데없이 많은 말은 남을 향한 화살이 되는 일도, 발도 없으면서 멀리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와 스스로에게 꽂히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필요한 상황에 적절한 대처도 말도 하지 않는 것 또한 그저 나 하나 참고 넘어가는 일이 아닌 일이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뭐든 적당히가 중요하지만 그것을 맞추는 일도 쉽지 않기에 아직은 그 정도를 못 맞췄던 거라 생각하고 싶었을까. 한참이 지나고도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만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쁜 일은 겪는 당시엔 헤어 나오지 못할 수렁에 빠진 것 같기도,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대상 없는 원망을 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지나가고 나면 무엇이든 남는 것이 있기에, 경험은 이토록 배움을 주기도 하고 사람을 크게 변화시키기도 하는 살아있는 책과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어릴 적 암으로 엄마를 잃은 뒤 스무 살이 되자마자부터 20년이 넘도록 매해 건강검진을 철저하게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결벽증과 예민함으로 스트레스 관리에 실패한 결과 40대에 돌아가신 아빠를 탓하며 애써 무덤덤한 성격으로 바꿔보려 노력하는 모습도 보았다. 태어난 연월일시의 사주대로 산다거나 성격이 팔자라는 말도 있다지만, 그보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치만큼 생각하고 방향을 잡고 살아가는 것 같다. 보기에 딱하거나 내가 아닌 게 다행이다 싶은 힘든 일을 마주한 사람은 또 그만큼 강해지고 단단해지는 모습을 여럿 보았다.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일도 물론. 그럼에도 나를 포함하여 내가 아는 이들 모두 직접경험으로는 좋은 일이 훨씬 많기를, 나쁜 일은 책으로만 만나도 충분한 지혜를 얻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