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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Nov 17. 2023

복 많은 차원장의 양파 같은 하루

2028년 11월 10일 금요일, 햇님이랑 구름이랑

“ Are next skater is from Republic of Korea, Jia Shin~”

‘잘해보자 지아야’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모아진다. ‘ 첫 점프 너무 긴장하지 말고, 쿼드러플 플립 더블 토, OK. 그다음 트리플악셀~ 됐어! 이제 플라잉 싯 스핀~’

   


 직관 중이다. 김연아를 시작으로 피겨 스케이팅 팬이 된 지 20여 년 만에 국제 대회 참관이 처음이다. 그것도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프랑스. 연아 때는 혼자서 타지를 가기가 두려웠고, 재희가 생기고는 낳고 키우느라, 그 후에는 멀리까지 찾아갈 만큼 응원하는 선수가 없어 팬 치고 참 많은 시간이 지나 이제야 쌩 눈으로 본다. 이 나이 먹고 애들처럼 국대 선수 경기 보러 가냐고 타박인지 질투인지 모를 말을 내뱉던 남편이지만, 혼자 보내기 불안하다며 따라와서는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 재희와 시간을 보내주고 있어 고마운 마음이다. 물론 교수로 일하며 얻는 스트레스에서 잠시 해방도 되고, 이제 몇 달 후면 고등학생이 되는 재희와 예쁜 추억도 만들 심산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국내처럼 링크장 안이 추울까 봐 폴라티에 핫팩을 앞, 뒤판에 덕지덕지 붙이고도 다운 조끼, 거기다 두꺼운 패딩까지 입고 왔더니 슬슬 덥다. 뒤에서 보면 딱 온천욕 하고 나와 김이 폴폴 오르는 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이겠지. 아이스 링크장이 이렇게 따뜻할 수가. 그 옛날 겨울이면 나를 두고 쌩 지나가 버리는 버스 꽁무니에 대고 별 새끼를 다 찾고 18단을 외우던, 귀신보다 추위가 더 무서운 내가 춥지 않다. 슬쩍 졸린 느낌까지 든다. 지금 2시니 한국은 밤 10시, 시차 적응이 덜 된 건가.

     

 Kiss & Cry Zone에 앉아 있던 지아가 시즌 베스트 점수를 얻는 모습과 이제 막 빙판에 들어서서 마지막 점검을 하는 선수의 긴장감이 대조적이다. 어째 분위기가 첫 점프부터 실수하고 멘털 나가버릴 것 같은~ 아, 이럴 땐 나의 촉이 미안하다. 에잇, 이 선수 경기 더는 못 보겠다.

     

 잠시 눈을 감으니 지난주 내게 있어 감사함의 연속이던 날이 떠오른다. 꿈만 같았던.

오래전부터 이은경 선생님께서 한 번씩 아드님과 하셨던 선행. 수억씩 기부하는 셀럽들보다 왜 그 모습이 더 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누군가에게 내 고마운 마음을 양껏 표현할 수 있을 때,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김원장과 좋은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품어졌다는 기억만 날 뿐이다. 추진력 하나는 발사된 로켓 같은 김원장 덕에 어쩌다 보니 자선 바자회를 열어버렸다. 목적은 '소외된 아동과 안질환 환아를 위한 기금 마련'. 눈이 좋지 않아 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절망했던 나 같은 어린이가 없기를, 어릴 때 치료해서 남들과 다름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우리 나중에 50대 되고 아이들 다 자라면 같이 봉사활동 다닐까? ”

6년 전, 문득 든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을 때 ‘기꺼이’라고 답했던 친구가 지금이 그때라며 밀어붙였다. 생각만 오만 번씩 하던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고는 오천 번씩만 한다지만,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도 재능인 듯. 부끄러움 많고 아쉬운 소리 잘못하는 사람이 홍보는 어떻게 했는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바람에 기억도 희미하다. 와 주신 분들 모두가 소중할 뿐.

     


강력한 내 기도와 상상 덕분인지 타지 생활을 1년 반 만에 정리하고 고향의 호반에 자리 잡았었다. '그러고 보니 호반 주민분들도 많이 와 주셨네. 우리 옆집인 502호, 102동에 사는 애제자인 주희네, 그 외 ‘호반에서 왔어요’ 하던 분들까지. 한국 들어가면 떡이라도 돌려야지.  아 떡! 작년, 엄마아빠 집터에 3층 건물 올려드릴 때 공사 전에 고사를 지내니 마니 두 분이 귀엽게도 티격태격하시더니 결국 엄마 뜻대로 시루떡을 시루째로 올렸었지. 손이 그리 크지 않은 분이 떡을 얼마나 많이 하셨길래 동네 사람들 다 나눠 드리고도 남았을까. 그나저나 20년 가까이 엄마아빠 건물에 계셨던 지업사 이모는 가게에 오는 손님들한테 그 떡 다 나눠주셨으려나? 이제 다시 1층에서 또 새로운 20년을 지내시겠지? 아들이 이어가 계속 그렇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 이번에 들어온 CU 편의점 사장님도 참 좋은 분 같아 다행이다. 손주들 주신다고 바자회에 오셔서 물건도 많이 사주셨는데, 뭘 좋아하시려나, 맛난 거 사다 드려야지. 맞아, 2층에 들어온 건설회사 사장님도 좋은 일에 보태라며 봉투도 주셨는데, 감사한 일 투성이네. ‘

@ unsplash

‘ 이렇게나 귀인들이 주변에 깔린 줄도 모르고, 난 왜 이리 빽도 없냐고 한탄하던 때가 있었네. 살아볼수록 깨달아, 나이 헛먹는 거 아니라더니. 이번에 학부모님들 도움이 진짜 컸네. 10년 가까이 아이들 자신감, 성취감 키운다고 애썼더니 감사하게도 알아봐 주시고, 성실한 건 모를 것 같아도 다 알게 되는가 봐. 이번 바자회도 학부모님들이 아니었으면 김원장이랑 둘이서 그 많은 음식, 물건들을 다 어떻게 준비하고 팔아. 턱도 없지. 한 분 한 분 감사한 마음 더 표현했어야 했는데.. 참, 벌써 3선 의원인 김변호사님도 감사했지. 이름만 올려놓고 당원으로 활동한 것도 없는데 좋은 일 도와주신다고 바자회 장소도 알아봐 주시고 금일봉까지.

     

‘징~’ 뭐지? 문자네. ‘강사님 다음 주 목요일 ’ 마이크로바이옴, 치매를 말한다 ‘ 오전 11시, 확인차 연락드려요. 지난번처럼 30분 전에 오셔서 시설 확인 부탁드려요. -롯데마트 문화센터 강좌기획 담당자’ ‘맞다~, 강의 내용 한 번 더 확인해야 하는데 이따 숙소 들어가면 봐야겠다. 대전에는 언제 가지? 코로나 때문에 무한 연기된 거 의과학연구원에서 할 일 해주고, 틈틈이 가서 교육받아 이만큼이라도 하는데 더 노력해야지. 아~ 흑염소를 한 마리 더 먹어야 하나, 금요일엔 세미나까지 있고 요즘 체력 너무 달리는데. 아니지, 나보다 더 바쁜 은경선생님도 팔팔하신데 약한 소리는. 아닌가? 그렇게 바쁘신데 에너지 넘치시는 건 특별한 비결이 있으신 건가? 작년에 첫 책 낼 때 추천사도 써 주시고, 우리 동기들 책도 검수해 주시고 꾸준히 출간까지, 하루를 48시간으로 사시나? 존경을 안 할 수가 없어. 거기다 전국을 몇 바퀴인지 셀 수 없이 도시더니 이젠 해외까지 다니시고 정말 대단하셔. 근처에 강의 있으셔서 오셨다며 바자회에도 잠깐 들러 주셨는데 얼마나 반갑고 감사하던지, 우리 선생님 보약을 해드릴까? 2주 뒤 주말에 있을 우리 모임 때 드리면 되겠네.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브런치프로젝트 2기 동기님들까지, 감사한 분들이 끝도 없고만. 세상 복 다 받았네.’

    


“ The short program score please. She has earned seventy two point five zero points in the short program. ”

한 시간 반 정도의 여자 싱글 경기 시간이 벌써 끝나간다. 막 그룹 첫 번째 순서였던 지아 선수 이후로 포디움에 오를 가능성이 농후한 선수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나오니 더 흥미진진해야 할 경기인데, 특별한 경험이었던 그 시간을 돌아보느라 한껏 눈에 담질 못했다. 괜찮다. 오늘은 예선에 해당하는 쇼트 경기이고 내일은 결승전 격인 프리 게임이니 내일 집중하면 된다.

    

 이제 남편과 재희가 기다리는 카페에 들렀다 함께 레페토 매장에 갈 시간이다. 재희가 태어나기 전부터 배우던 발레. 그 후로도 배우다 말다를 반복하던 걸 요즘은 본격적으로 발레메이트 페스티벌 참가를 준비하는 중이다. 그것도 포인트 슈즈로. 연습용 발레슈즈로도 나가보지 않은 대회를 7년 전에 배우다 만 토슈즈를 신고 이 나이에 나간다니 남편부터 그러다 골절상 입을까 아서라 말리고 있다. 5년 전 마법이 시작된 이래로 마음속에만 고이 두었던 꿈들을 하나씩 꺼내 실현해 왔다. 발레 대회 출전도 그중 하나다. 상까지 타면야 금상첨화겠지만 그게 아니면 어떠랴.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을. 한동안 스튜디오에서 긴 시간 살아야 하니 넉넉히 구입해야겠다. 생각만으로도 발가락뼈 하나하나 뭉개지는 묵직하고 찌릿한 느낌이지만, 두 발끝으로 온몸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니 적응하는 수밖에. 내 발에 잘 맞는 제품을 찾으면 훨씬 편하겠지. 레페토에 없으면 내 발에 맞는 슈즈 찾아 삼만리 하지 뭐. 블락이나 그리쉬코 아님 웨어무아? (요상한 이름들은 발레용품 브랜드입니다) 남편과 재희 입이 댓 발 나올 것이 뻔하다. 자기들은 나를 위해 따라다니며 기다려야 하는 내 부록이냐며. 답하건대, 그 덕에 파리 이곳저곳을 혹은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좋은 구경 하지 않냐고. 거기다 남프랑스에 있는 니스도 가자고 꼬셔야지. 지난 여행이 떠오를 테니 나온 입이 금방 들어가리라 믿는다. 다음번 프랑스 여행 때는 현지 발레 클래스도 신청해서 들어야겠다.


 주는 것만 먹던 내가 이렇게 원하는 걸 찾아 해 나가는 모습이 스스로 대견하다.

꾸준히 읽고 쓰기를 통해 나를 찾기 시작하고 바뀌기 시작했고,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모두 5년 전 브런치 프로젝트를 놓치지 않은 덕이다. 나와 인연이 되어주신 이은경 선생님과 우리 동기님들께 무한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5년 후를 그리며 링크장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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