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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gine Feb 01. 2020

머리에 까치집을 이고서

어젯밤, 갑자기 잡힌 약속이 하나 있었다. 오늘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또 갑자기 취소되었다.

알람을 맞추고 잤지만, 덕분에 그 알람 소리를 무시한 채로 더 잘 수가 있었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드는 일 다음으로 행복한 일은 알람을 듣고서도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는 일 아닐까.


그렇게 알람을 무시한 채로 조금 더 단잠을 자다가 일어나니 머리엔 까치집이 생겨있었다.

예전에, 그러니까 어깨를 넘는 길이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을 땐, 가끔 머리를 감지 않고서도 밖에 나가 잘 다녔다. 머리를 미처 감지 못한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거든. 그런데 머리가 짧아진 후론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매번 다른 모양으로 생기는, 오늘도 여김없이 생겨버린 저 까치집 때문에 말이지. ㅎㅎㅎ


집은 조용했다.

부모님은 속초로 주말여행을 가셨고, 동생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무튼 그래서 집이 조용했다.

우선 보일러를 켰다. 겨울에도 씻을 때만 보일러를 트는 게 허용되는 집에서 몰래 할 수 있는 나만의 작은(?) 사치였고, 침대 위로 금방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와 집 공간 전체에 알리는 행위였다.


우선 전기 포트에 물을 담아 데웠다. 그리곤 쌓인 설거지를 했다. 고무장갑 위로 둔하지만 은근하게 따뜻한 물이 느껴졌다. 뽀득뽀득.

막 설거지를 끝낸 접시와 컵들 사이에서 하얀 머그컵을 하나 꺼내 들었다.


밖에선 주로 얼음이 들어간 음료를 시키곤 한다. 내가 카페를 가는 이유는 십중팔구가 동행인과 마주 앉아, 혹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기에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음료를 마시는 속도는 건네지는 이야기의 속도보다 한참이나 느릴 수밖에 없더라. 천천히 식어버린 음료를 마시면 따뜻할 때 들이킨 한 모금보다 맛이 많이 못한 경우가 많아 잔에 음료가 남아 있어도 끝내 마지막 몇 모금을 남겨두어야 했다. 이런 경우가 반복되자, 차라리 애초부터 차가운 음료를 고르는 방법을 택한 거였다. 온기가 사라진 맛보단 얼음이 녹아 살짝 밍밍해진 맛이 더 내 취향이었다.

가끔 혼자서 카페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그리거나 일기를 쓰거나 멍을 때리거나 시간을 보내느라 음료에만 집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집에선 그런 머리 굴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따뜻한 커피를 내리기 전 머그잔을 미리 온수로 데워둘 수도 있었고, 그러다 입에 닿는 컵의 온기가 식어버린 걸 느끼면 얼음을 꺼내어 잔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퐁당퐁당.


얘기가 잠시 딴 데로 샜는데, 무튼 유리잔이 아닌 머그컵을 꺼내 든 건 그런 이유였다.

커피를 내리며 냉동실에서 빵을 꺼내어 토스트기에 넣었다. 그리곤 사둔 지 잊고 있다가 얼마 전에 찬장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커트러리를 꺼냈다.

동글동글한 마감에 손잡이 부분에 색이 있는 게 포인트였다. 판매점에는 다양한 색들이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걸 골라보겠다고 진열된 구석에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골라온 거였다.

이렇게 우리 집 부엌엔 내 취향이 조금씩 끼어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찬장 안의 다른 그릇들에도 눈길이 머무는 순간이 조금씩 길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려나. 부모님의 취향은 분명 나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그래서 더 재밌고 오래 지켜볼 일이었다.


토스터기에서 빵이 다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구워낸 건 빵 한 조각. 꽤 큰 한 조각이었지만 미리 덜어둔 버터와 시럽이 아직 남아 빵을 한 개 더 꺼내야 했다. 그리고서도 한 번 더 같은 걸 반복하고 나서야 그릇을 비울 수 있었다. 미리 덜어둔 버터와 시럽은 빵 세 조각의 분량이었던 거다. 덕분에 생각보다 배부른 식사를 마쳤다. 가끔 잼 대신에 발라 먹는 방법인데 오랜만에 먹으니 역시나 맛있었다. 사실, 뭐든 머리에 까치집을 이고서 먹는다면 맛이 없을 리가 없긴 하지.



시간을 보니 두시 반이 지나있었다. 어제 잡혔던 오늘의 약속이 두시 즈음이었으니, 약속이 취소되었다 한들 어느새 약속해둔 시간에 맞춰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일단은 계속 머리에 까치집을 이고 있기로 했다.


백수더라도 평일엔 나가야 맘이 편했던 건 남들 일할 때 맞춰 놀고 싶은 심술이 있어서였는데, 남들 쉬는 주말에 맞춰 나도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퇴사를 하고 여행을 다녀온 지도 한 달이 더 넘었고 벌써 2월이다. 애초에 했던 걱정과 다르게 집에서만 늘어지는 하루들만 가득하게 보내지 않았는데, 돌아와서도 어쩌면 나는 계속 여행을 하는 중이었나 보다. 어제 누가 그렇게 말해주길래 그런가요, 했었는데 진짜 그랬다. 수입이 없으니 얼마 없는 잔고가 계속 줄어드는 것도 여행 중과 같았다... 하하하

계속해서 소비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오늘은 집에만 있어야겠다는 결심이 더 굳어진다.

그리하여 떠올린 할 일이란, 브런치에 매거진으로 발행해두었던 여행을 하며 썼던 글들을 '브런치 북'으로 정리를 하는 것.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좀 더 과시적인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 할 것만 같았기에 할까 말까 하며 미뤄뒀던 일을 해보기로 한 거다.


막상 해보기로 마음을 먹으니 큰 산이 두 개 보인다.


1. 제목을 새로 짓는 일 - 가제로 4paris3london 이라 적어두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바꿔야겠는데 뭐가 좋을까..

2. 써왔던 모든 글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일 - 써왔던 글에 부끄러움이 없어야겠지만 다시 읽으며 그런 것들을 발견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부끄러움이 밀려와 머리가 아프다..


아까 빵과 함께 먹을 땐 먹는 것에만 오로지 집중했기에 커피를 따뜻한 채로 다 마실 수 있었는데, 다시 내릴 커피는 애초에 차갑게 내려 마셔야겠다.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커피가 담긴 잔을 다 비울 때면 위에 적어둔 두 개의 큰 산이 어느 정도 깎아져 있어야겠고...


그나저나 머리에 까치집을 두고서 이렇게 많은 글자를 쏟아낸 경험은 또 처음이네.

이 글을 마주한 당신의 머리에도 까치집이 있다면 ㅎㅎ 오늘은 애써 그 흔적을 지우지 말고 그냥 둡시다.

저처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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