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고 신분을 뛰어넘는 흔한 로맨스물이라는 오해는 접어두자.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이니까. 오랜만에 특정 요일이 기다려지는 웹툰을 찾았다. 마음이 늙은 탓인지 재미있는 웹툰이 없어서인지 요즘 다음 이야기를 빨리 보고 싶은 웹툰이 몇 개 없다. 다음웹툰 매주 금요일에 연재되고 있는 <유리의 벽>은 과금의 유혹을 버티기가 힘든 웹툰 중 하나다.
뼛속부터 귀족인 여자 주인공 릴리는 귀족 모임에서 마주친 음악 교사 에드워드에게 첫눈에 반한다. 우연히 그에게 과외를 받게 되고 점점 사랑을 키워가는 릴리. 그러나 에드워드는 사실 귀족을 증오한다. 릴리의 의도하지 않은 배려 없는 행동에 그는 그녀를 다른 귀족들과 똑같은 취급을 하며 부정적인 마음을 키워간다. 그 사실을 전혀 알리 없는 릴리는 터져 버린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고백해버리고, 에드워드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환멸 가득한 마음을 내비치며 뻥 차 버린다. 그 후 릴리의 집은 수많은 빚을 지게 되어 순식간에 몰락한다. 귀족으로서 누린 특혜를 빼앗길 뿐만 아니라 함께 살아온 하인들에게도 배신 당해 처세술과 눈치가 빨라진 릴리. 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가정교사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많은 부를 축적해 귀족이 된 에드워드와 마주하게 된다.
각종 클리셰를 교묘하게 피해 가는 웹툰
첫 시작부터 깬 것이나 다름없다. 순정 만화의 흔한 루트 몇 가지 중 하나는 여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던 남자가 알고 보니 쓰레기였고, 그녀의 곁을 지고지순 지키던 남자에게 마음을 여는 경우. 여자 주인공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데 알고 보니 그도 그녀를 좋아하는 경우. 현실에서는 상처를 보듬어줄 왕자님은 곁에 없는 것이 일반적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혹은 이미 여자 친구가 있다). 이 웹툰은 장장 10회가 넘도록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혐오(?)한다. 그리고 철없는 귀족 아가씨 릴리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어차피 독자인 우리는 그 둘이 나중에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알지만 첫 스타트가 만만치 않음을 감지한다. 이거 분명 로맨스물인데, 어딘가 방향이 독특하다. 아무리 회차를 넘겨도 그럴싸한 서브 남주는 등장하지 않는다. 개괄적인 줄거리는 분명 평범한데 전개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 캐릭터도, 사건도 뭐든 흔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으니 매 회가 소소한 반전의 연속이다. 점입가경이라는 게 이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중세 시대의 빛깔과 연출
뛰어난 연출에 필요한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다. 캐릭터들의 살아있는 표정, 그 만화에서만 느껴지는 색감, 안정적인 몸동작, 무형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연출법 등. <유리의 벽>은 우선 안정적인 그림체가 장점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중세 시대풍의 시대를 다루는 만화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시대를 다뤘다는 자체만으로 눈에 띌 수 있다.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 등을 잘 표현할 수만 있다면 보는 눈이 즐겁다. <유리의 벽>에서는 화려한 듯 안정감 있는 색감이 인상적이다. 이따금 보랏빛이 도는 색감에 시선을 뺏긴다.
입체적이다 못해 VR 수준의 캐릭터
몸의 움직임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손가락의 모양, 앉고 일어서는 동작, 손을 내미는 것, 다양한 각도에서의 신체 등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체 공부가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근육의 움직임이나 비율 등이 조금만 틀어지거나 다양한 구도에서 인체를 그려보지 않으면 자연스러운 동작이 나오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조호 작가님은 내공이 탄탄한 분이실 거라고 짐작한다.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인 찝찝함, 의심, 은폐, 가식, 설렘 등을 정확하게 그려낸다. 뼈가 시리도록 매서운 현실 속에 내던져진 캐릭터들은 더욱 현실감 있게 반응한다. 혹자는 이런 평을 하기도 했다. '캐릭터가 입체적이다 못해 VR 수준'이라고.
수많은 강점을 갖고 있는 유리의 벽은 무심코 첫 화를 봤다가 회차를 거듭할수록 그다음 화가 궁금해서 못 참게 만드는 마성의 웹툰이다. 뻔한 듯 뻔하지 않은 다음 금요웹툰 <유리의 벽>을 강력 추천한다.
Reina - 그림 계정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