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민 Sep 13. 2022

밤에 듣는 이야기 #5

은평의 하루 (1)



은평의 하루 (1)

- 은평의 하루 (2)

- 은평의 하루 (3)






오랜 시간 해오던 일을 정리하고 새로운 업종으로 이직하기 위해 잠시 백수가 된 동민은 오랜만에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바쁘게 일하던 시절에 이 시간은 그토록 원했던 것이고 수많은 계획을 상상했었지만 막상 그 시간이 주어지면 제대로 쓰지 못한다더니, 동민은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그동안 잦은 야근도 모자라 주말과 휴일까지 반납해가며 열심히 일만 하는 게 일상이었다 보니, 이렇게 갑자기 주어진 심심한 일상이 오히려 어색했고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이직은 딱히 준비라고 할 것 까지는 없었기에 일이 시작되는 날까지 적당히 공부하면서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저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동민은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시작으로 천천히 하나씩 하다 보면 이 어색한 일상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운동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맛집도 가고 술도 마시면서 그간의 스트레스를 풀고 나면 나 홀로 여행으로 이 휴식을 마무리하는 계획을 그려보았다.


그래서 동민은 어제 낮에는 산책과 카페에서 여유를 즐겼고, 저녁에는 주말에는 뭘 할까 상상하면서 영화를 보며 혼술을 즐기다 늦게 잠들었다.


항상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할 때면 쓰러져 기절하듯 잠에 들기 일쑤였으니, 이런 간단한 여유조차도 행복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나 빼고 다들 이렇게 살고 있다는 말이지?'


그동안 열심히만 살았던 자신을 바보 같다 생각하며 잠에 빠져들었지만, 그 얼굴은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주인 허락도 없이 창을 넘어 들어온 아침 햇살이 동민의 얼굴을 스치며 깨우려 했지만 동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숙취가 남은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늦잠이라고 하는 게으름을 즐겨보고 싶었으니까.


동민은 얼굴을 돌려 베개에 묻고 다시 잠을 청했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전화벨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모른 척, 안 들리는 척 외면했다.


급한 전화가 올 일도 없고 그래 봐야 광고이거나 쓸데없는 전화일 테니까.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으아아아아아!!!"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할 기세다.


겨우 눈을 뜬 동민은 인상을 팍 구겨 짜증을 새긴 얼굴로 핸드폰을 잡았다.



- 정희



동네 모임에서 알게 된 친한 동생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야 시원하게 욕을 하든 차단을 하든 거리낌이 없을 테니까.



"야 이놈아, 오빠가 늦잠 좀 주무시겠다는데 아침부터 이게 뭔..."


"오빠 어디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전화 왜 안되는데?!"


지금 받았잖니...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내가..."


"아 어디냐고!! 집이야? 지금 집이야??"



안 듣는다.


이 녀석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



"어 자고 있었지. 그러니까......"


"알았어 곧 갈게! 기다려!"


뚝.



응...?

뭐라고?

여길 온다고?

아니 왜?



내가 자는 중이라는 말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8시 30분쯤을 가리키고 있었고,


이미 잠은 다 깨버린 듯했지만 멍한 머리로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동민은 짜증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 몸을 베베 꼬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고 나니 잠이 확 깨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건 일시적인 게 분명하리라.


동생 녀석이 오기 전에 좀 씻으며 잠을 깨야겠다 생각했다.



쿵쿵쿵!



현관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집주인은 아침에 자주 쳐들어온다. 그러니 저 소리 역시 집주인이겠지.


왜 다들 아침부터 난리인 걸까?


동민은 그저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고 싶었지만, 이 동네는 그런 동민을 질투해 온갖 방해를 걸어오는 것 같았다.


분명 터가 안 좋은 거야…….


동민은 순간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쿵쿵쿵!


"오빠 나야! 문 열어!!!"



아니 몇 분이나 지났다고…….


진짜 왔네.

때리고 싶다.

한 대만 때려도 될까?


이제 막 일어나서 부스스한 몰골의 동민이었지만,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저 불청객이 왜 왔는지 어떻게 쫓아낼지를 고민해야 했으니까.


동민은 짜증을 한 껏 얼굴에 담아 문을 열었다.



"아니 왜 이렇게 늦게 열어!!"



오히려 짜증을 내면서 달리듯이 후다닥 들어온 정희는


곧장 화장실로 뛰어갔다.




동민은 그 모습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

화장실이 급한 거였구나.

내 집을 공공 화장실쯤으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아무래도 이직보다는 이사부터 가야 할 것 같았다.



동민은 머리가 아파왔다.


숙취 때문인지 저 녀석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머리도 아프고 속도 쓰라린 것 같았다.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다시 침대에 누워서 TV를 켰다.


이렇게 TV를 보고 있자니 뭔가 좀 서글픔을 느껴지는 것 같던 차에 이내 그 원흉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빠 아직 밥 안 먹었지?"


"……. 먹었겠냐?"


"그럴 줄 알고 내가 왔잖아. 모자 눌러쓰고 나와. 요 앞에 기사식당 알지? 거기로 와. 밥 먹게. 알았지? 먼저 가있을 테니 빨리 와!"


"아니 나는……"


쿵.



정희는 대답도 듣기 전에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냥 자고 싶은데……

무시하고 핸드폰 끄고 그냥 자버리고 싶은데……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걸까?



그러면 또 현관문 두드리면서 나오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겠지.


그 소리에 옆집 윗집이 무슨 일인지 나와서 보기라도 하면 너무 창피할 것 같았다.


저건 신이 나를 벌하기 위해 내린 재앙이다.


아니 진짜 신이 존재한다면 내가 아니라 저 녀석에게 벌을 내렸겠지.


동민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간단히 씻은 뒤 운동복 차림으로 식당을 찾았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침 식사 중인 아침 식사 중인 기사분들이 보였다.


모두 혼자 듯 각자의 테이블에서 TV를 보며 조용히 식사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는 최소한 지금은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여기여기! 빨리 와서 앉아봐 빨리!"



동민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당연하게도 정희 녀석이 손을 흔들고 있었고, 그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앉아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동민은 조용한 식당에서 높은 톤으로 떠들어대는 재앙 같은 동생을 일별 하고는 웃고 있는 진우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역시 네놈 하고 같이 있었군. 그런데 너네 술 마시냐? 이 아침부터?"



하지만 정희는 내 질문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한 채 내 팔을 잡아당기며 수다를 시작했다.



"아니 오빠, 내 말 좀 들어봐. 글쎄 어제 진우하고 같이 모임에 나갔었거든. 그런데……"


"내 밥은 어딨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들어봐. 어제 있잖아……"



테이블 위에는 제육볶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접시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고등어구이, 그리고 이미 비워진 몇 개의 술병이 보였다.


그리고 저 녀석은 여전히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애초에 저 녀석과 대화라는 걸 한 적이 있기는 한 걸까?

그렇다면 대체 왜, 어째서 친해진 걸까......?


동민이는 씩 웃으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썩을…….



작가의 이전글 밤에 듣는 이야기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