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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Sep 18. 2022

밤에 듣는 이야기 #8

여기 있었구나. (1)

- 여기 있었구나. (1)

- 여기 있었구나. (2)

- 여기 있었구나. (3)





“...... 오빠, 내 말 듣고 있어?”


“아, 미안. 잠시 딴생각이 좀 들었나봐.”


“아닌데...... 그냥 멍 때린 거 같은데?”


“음. 그럴지도 모르겠다. 미안, 미안!”


“이 인간 요즘 왜 자꾸 멍해지지?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민서는 동민의 오랜 지인이었다.


10년이 넘게 연락하는 사이였지만 실제로 둘이 만났던 적은 손에 꼽힐 정도라 말 그대로 통화만 하는 사이었다.


그렇다 보니 서로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고는 있지만 서로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민은 이렇게 민서와 통화할 때면 오랜 친구와 얘기를 나누는 편안함이 있어 이런저런 가벼운 수다들을 나누었지만, 지금은 민서가 하는 이야기가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왜 또 이러지?'



요즘 들어 갑작스레 멍해지는 일을 자주 겪고 있는데, 사람과 대화할 때나 일하는 도중에도 부지불식간에 생기다 보니 생활에 여러 불편함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으니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자꾸 멍해지네. 기분도 좀 다운되는 것 같고......"


"그거 요즘 몇 달 동안 계속 그랬다며?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 뭔데? 얘기 좀 해봐."


"나도 이게 뭔지 좀 알고 싶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우울증 그런 비슷한 건지. 근데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어."



자기 상태에 대해서는 본인이 의사라고, 웬만하면 스스로 진단하고 대안까지 고민했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느껴지는 게 전혀 없었다.


굳이 한 가지 느낌을 꼽으라면,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 마치 상실감처럼.


그런 생각들을 하던 동민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잃은 건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많은 것들이 좋아지고 있는걸.'



항상 사람에 치이고 일에 쫓기다 잠에 들 때면 어두운 미래에 대한 생각이 가슴을 조르며 잠들던 게 동민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올 해가 돼서는 사람에 치일 일도, 다급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심지어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많이 줄어들었고, 항상 원했던 저녁시간에 주말과 휴일이라는 것 마저 생겼으니 오히려 항상 즐거워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분명 그래야 할 텐데, 즐거움이라는 건 남 일이라는 듯 아무 감정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기분전환이 필요한 것 같아. 드라이브 좀 나가봐야겠어.'



오늘 하고 싶은 일을 정한 동민은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강화도 초입 길은 주말이 되면 항상 차가 많지만, 오늘은 제법 한가로움이 느껴졌다.


날씨가 어두워서 그런 건지 다른 곳으로 놀러 간 사람들이 많아 그런 건지는 몰라도, 동민에게는 좋은 상황일 뿐이었다.


초입을 지나 남쪽 해안으로 향하는 좁은 도로를 달리면 식당과 카페가 적잖이 보인다.


그 길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니 오래전에 동민이 자주 찾았던 카페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차장이 한산한걸 보니 사람이 없나 보네. 오늘은 조용하게 보낼 수 있겠어!'



조용하게 사색하고 싶었는데 마침 한가한 카페를 보니 살짝 기대감이 들었다. 주차를 하고 막 차에서 내리려던 차에 전화벨이 울렸다.



- 정희


'얘가 웬일이지?'



은평에서 이사를 온 이후 오랫동안 서로 안부를 묻지 않았기에 갑자기 걸려온 정희의 전화에 조금 당황했지만, 별 일 아니겠지 싶은 생각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정희야. 오랜만이네?"


"오빠 오빠!! 어디야? 뭐해? 밥은 먹었어? 오빠 너는 손까락이 부러졌냐! 왜 연락도 안 하고 살아!!"


"......"



오늘의 한가로움이 깨질 것 같은 불안감이 느껴진다.

살짝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 좀 쐬고 싶어서 드라이브 나왔어. 넌 잘 지내고 있지?"


"와 대박, 좋은 건 자기 혼자 다 하네. 배신자! 어쩜 그럴 수 있지? 아니, 그건 그렇고 뭔 일 있는 거야? 갑자기 웬 바람이야. 안 어울리게?"



침착하자.

여기서 말리면 오늘 하루를 망치게 된다.



"아무 일 없지. 그냥 요즘 기분이 좀 다운돼있어서 그래."


"별일 없으면 다행이고. 진짜 별일 없는 거지? 아, 오빠 잠깐만. 이따 다시 전화할께!"


뚝.



그래, 이 녀석과 통화하는 건 이런 기분이었지.


하지만 동민이는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요란스러운 전화 덕분에 기분이 살짝 풀리는 것 같았으니까.


카페에 들어선 동민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역시나 손님은 거의 없었고 한가함과 조용한 분위기를 맞이하며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창가 너머로는 작은 정원에서 신나게 뛰놀고 있는 꼬맹이들이 보였고, 저 멀리 서해의 해안선이 넘실거렸다.


조용하면서도 행복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는 살짝 어두운 날씨마저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듯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어서 빠져들고 싶은 동민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생각해보자. 요즘 왜 자꾸 멍해지는지... 아니지. 문제는 그게 아니라 계속 느껴지는 허전함 같은 기분일 거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보려 해도 도무지 집중이 할 수가 없었다.

계속 엉뚱한 생각이 들고 저녁에 뭐 먹을지, 다음 주말에는 뭐하고 보낼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간단한 작업이라도 시작해보면 집중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가져온 노트북을 꺼내 열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텅 빈 바탕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 또 멍해지려고 하네. 젠장.'



답답했다.


집중할 수도 없고 뭔가 일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은 묘한 불안함을 만들고 있었다.


완벽한 것 같은 분위기도 날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동민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그러고 보니 정희는 다시 연락한다더니, 또 쓸데없는 소리나 늘어놓으려나?'



그래도 나와는 달리 저렇게 연락을 자주 하는 덕에 주변에 친구가 많은 거겠지.


나도 이 성격 좀 고쳐야 하는데.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문득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아무래도 허전함의 정체는 사람에 대한 외로움이 아닐까?


항상 일에만 치여 살다 보니 친구도 지인도 멀어져 버린 게 지금 이렇게 와닿는 걸까?


모르겠다.


생각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계속 맴돌기만 하다가 이내 희미해지며 다시 멍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띠리리리링.


- 정희



마침 울린 벨소리에 정신이 든 동민은 정신 차리려는 듯 머리를 저으며 전화를 받았다.



"그래, 정희야."


"오빠, 날개 없는 선풍기 쓰고 있지? 예전에 은평 살 때 집에서 본거 같은데?"


"어...... 그때 쓰던 건 버리고 왔어. 그리고 지금 집에 한대가 있긴 하지. 근데 왜?"


"아니, 나도 이쁜 거로 하나 살까 하는데 그거 쓸만해? 고장은 잘 안 나고? 모델 하나 추천 좀 해줘 봐. 당장 사야겠어. 지금 쓰는 건 언제 산거야?"



몇 마디 섞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머리까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저 빠르고 정신없는 말투는 아무래도 적응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러니까 그건... 지금 쓰는 건..."


......



어.....?

언제 산 거지?

언제부터 집에 있던 거지?



동민의 심장이 갑작스레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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