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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Sep 20. 2022

밤에 듣는 이야기 #10

여기 있었구나. (3)

- 여기 있었구나. (1)

- 여기 있었구나. (2)

- 여기 있었구나. (3)






아픈 일을 빨리 잊는다.

과거를 미화하고 정당화 한다.

때때로 선택적으로 남아

존재하지 않았던 일을 만들거나 사실을 왜곡한다.


기억이라는 건 어찌 보면 참 편리하다.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바꾸거나 합리화할 수 있으니까.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 했던가?

나약한 사람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일까?

인간의 선함을 시험하기 위해 내린 또 다른 고통은 아닌 걸까?



도로를 내달리는 동민은 확신했다.

분명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차가 도로 위를 질주한다.


작은 강변을 지나 다리에 접어드니 햇빛에 반짝이며 찰랑이는 넓은 강이 펼쳐진다.

아름답고 멋진 풍경이었지만 마음이 조급한 이의 눈에는 그저 빠르게 지나는 배경일뿐이다.


시장을 지나고 큰 경기장을 돌아서니 직선으로 펼쳐진 도로가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 도로의 끝자락에는 살짝 흐릿한 모습의 산이 넓은 풍채를 뽐내고 있다.


하지만 좁아진 시야는 도로 위의 차들만을 바라본다.



'여기서부터 직진이야. 내가 살던 그 집.'



조급하게 차를 몰아 달려온 동민은 은평에 진입한 순간부터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살았던 동네라 익숙해서일까?


이사한 이후로 2년간 찾은 적이 없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친근함이 느껴졌다.


마치 어제까지도 지냈던 것처럼.



북적이는 차들 사이를 지나 큰 골목에 접어드니, 저 멀리 동민이 살았던 집이 보였다.

중간중간 간판이 바뀌어있는 가게들을 보며 오랜만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감각으로 느껴졌다.


동민은 골목 한 구석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래, 이런 기분이었지. 한가로운 낮 시간에 이 골목은 이랬었어."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골목의 풍경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동민은 익숙함을 즐기려는 듯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딱히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익숙한 길을 걷다 보면 옛 생각들이 떠오를 거라 생각했다.


무작정 달려오긴 했지만 어떤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가는 차들로 엉켜있는 길에서 돌아보니 사람이 북적거리는 마트가 보였다. 집과 가까워서 동민이 자주 애용하던 할인마트였다.


잠시 들어가 볼까 생각했지만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며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기는 아무것도 없어. 골목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자.'



이 골목까지는 살던 동네라 친숙하지만, 저 건너부터는 아니었다. 어쩌다 한번 지난 길까지 기억할 수는 없었고, 사실 저 동네를 가본 기억도 없었다.


그러니 동민은 이 골목의 끝자락까지만 걸으려 했다.



"어?"



골목 끝에 놓인 횡단보도에 선 동민은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당황한 눈빛으로 길 건너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분명 가본 적 없는 길이 맞을 텐데......

저 간판들은 왜 이렇게 낯익은 거지?



"어어......"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한걸음. 또 한걸음.


길을 건너 새로운 골목 안으로 들어갈수록 기시감은 더욱 강해져 갔다.


카페와 빌라들을 지나니 저 멀리 빨간 벽돌의 성당과 한적해 보이는 교차로가 보였다.


결코 낯설지 않은 작은 길을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동민의 심장은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성당 앞 작은 구멍가게 앞에 다다랐을 때,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불편함이 느껴졌지만 이내 사라졌다.



'내가 여기 살았던 적이 있었나...?'



구멍가게 안에서 의자에 앉은 채 한가로이 노래를 부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꼭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천천히 몸을 돌려 가게 앞 골목 사거리를 둘러보았다.



쿵.



동민은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머릿속에 커다란 이명이 울려 퍼지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 어어......"



눈가가 촉촉해졌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하지만 발걸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잘 아는 것처럼 한 걸음씩 나아갔다.


작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에 들어선 동민은 잘게 떨리는 손을 들어 벽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걸어갔다.


손 끝에 느껴지는 거칠고 차가운 감각.

하지만 그 감각은 더없이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왜 흐르는지 모를 눈물이 눈을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어...... 아아아......"



무엇을 잊었던가.


골목 깊이 들어선 뒤에야 이제 다 왔다는 듯이 걸음이 멈췄고, 벽을 만지던 손을 가만히 내렸다.


천천히 걸어온 길을 뒤돌아 봤다.


내가 무엇을 지우고 살았던가.

대체 어쩌려고 그랬던 건가.



"어어... 으으으으...... 어으으으......"



혀를 잃은 사람처럼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어깨가 형편없이 떨리며 쓰러질 듯 몸이 휘청거렸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동민을 반기며 위로해주듯 눈물에 흠뻑 적신 빰을 쓰다듬었다.



'그래......'



툭.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몸을 돌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었기에.


하지만 동민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여기 있었구나.'




- 여기 있었구나.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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