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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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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이모 Nov 02. 2017

그대 먼 곳만 보네요

당신의 껍데기만 붙들고

그 남자의 직업은 조각가. 그는 아직 무명작가라 모델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마구간을 개조해서 만든 작업실의 월세를 내려면 먹고사는 것도 빠듯한데 어디서 모델을 찾을 수 있을까. 모델로서의 매력도 있어야 하고, 무명 조각가의 열악한 작업조건까지 기꺼이 받아들여줄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고민이 많던 그 남자 눈에 띈 사람은  양복점에서 수선일을 하는 여자였다. 아직 앳된 얼굴의 그녀가 조각가의 모델이 되어주기로 했다. 허름한 작업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작가와 모델로 만나 연인이 되었고 그곳에서 따뜻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남자가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그녀가 열심히 돈을 벌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던 것도-, 첫 아이를 낳을 때까지 가족들에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은 것도 그녀는 이해했다. 이유가 있겠지, 바쁘니까 그렇겠지. 예술가는 예민하니까 그랬겠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서 세상이 떠들썩하게 연애를 할 때도 그녀는 기다렸다. 헤어질 거라고 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돌아오겠지,  예술적인 영감을 얻느라고 그런 거겠지, 때가 되면 혼인신고도 하게 되겠지...... 오로지 한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 붙잡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그렇게 바보처럼 기다린 시간이 53년.  

스물네 살의 조각가 로뎅과 스무 살의 그녀 로즈 뵈레-  두 사람이 합법적인 부부가 된 것은 처음 만난 이후 53년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혼인신고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즈 뵈레는 세상을 떠났다.  


로즈뵈레의 젊은 시절 / 로뎅 작품


앞서 [꺼지지 않는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소개했듯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남자 주인공도 53년 7개월 11일 만에 사랑의 결실을 맺었지만, 그 남자는 소설 속에 살던 사람이고 로즈 뵈레는 현실 속에 살아 숨 쉬고 걸어 다니고 울고 웃는 실존인물이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참고 기다리는 일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꺼지지 않는 마음 - [콜레라 시대의 사랑] / 53년 7개월 11일 동안, 영영 살아있어요


로뎅의 이름 뒤에는 늘 까미유 끌로델이 거론된다. 그의 조수이자 연인이자 라이벌이었던 까미유 끌로델은 로즈 뵈레와는 영 딴판의 여자였다. 기본적인 성품이 다르기도 하겠고, 두 여인의 나이 차이가 스무 살쯤 됐으니 모든 것이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로뎅을 존경하되 그와 경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돌한 까미유 끌로델에 비하면 로즈 뵈레는 묵묵히 조강지처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로뎅이 로즈 뵈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를 향한 동물적인 충성심을 지닌 여자"라고 한걸 보면 그녀가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알 수 있으며, 로뎅이 그녀의 헌신을 얼마나 헌신짝처럼 여겼는지도 알 수 있다.  

까미유 끌로델과 헤어지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해놓고, 그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더 치열하게 그녀와 교류하는 남편을 보면서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밖에서 나가면이야 남들이 알아주는 조각가지만, 집에서는 그냥 '내 남자'일뿐인데, 저 인간이 저렇게 다른 여자한테 푹 빠져있다니. 로뎅의 빈 껍데기를 붙들고 있는 일은 어쩌면 지질하고 가난했던 무명시절을 견디는 일보다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대 먼 곳만 보네요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날 볼 수 있을 텐데-

처음엔 그대로 좋았죠, 그저 볼 수만 있다면

하지만 끝없는 기다림에 이제 난 지쳐 가나 봐


한 걸음 뒤엔 항상 내가 있었는데

그댄 영원히 내 모습 볼 수 없나요

나를 바라보며 내게 손짓하면, 언제나 사랑할 텐데   

/ 일기예보 [인형의 꿈]


53년 만에 겨우 합법적인 부부가 됐지만 몇 주 지나지 않아 로즈 뵈레는 세상을 떠났다. 가슴에 얹혀있던 큰일이 해결되고 나니 맥이 빠져 버린 것일까. 로뎅이 과세를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혼인신고를 했다는 얘기도 있긴 한데 어쨌든 그녀 입장에서 보면 눈감기 전에 제일 찜찜한 숙제를 해결한 셈이긴 하다.

로즈 뵈레 못지않게 까미유 끌로델도 답답했을 것이다. 내가 좋으면 마누라를 내팽개치고 달려오던가, 아니면 아주 여우같이 비밀리에 불륜을 저지르던가, 이도 저도 아니면 나랑 딱 잘라서 헤어지면 될 것을 왜 저렇게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치는 걸까. 결국 까미유 끌로델은 로뎅과 헤어진 뒤 정신병원에서 긴 시간을 보낸 걸 보면 로뎅은 두 여자 모두에게 야속한 남자.


가까이에 있어도 그 사람의 진짜 속마음을 모르면 외롭다.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일은 세상에서 제일 쓸쓸한 일이니까.



* 남의 사랑, 한 줄 요약

: 조각가 로뎅은 까미유 끌로델을 사랑했지만, 그의 아내를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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