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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이모 Nov 03. 2017

조심해! 연말이 오고 있어!


비가 그치고 낙엽이 카펫처럼 깔린 오후. 강아지 사료를 사러 동물병원에 갔다가 내년 달력을 받았다. 11월이 된 지 닷새도 안됐는데 벌써 새해 달력이라니-!  새카만 구슬 같은 눈동자를 지닌 고양이와 강아지 사진 열두 장이 담긴 새 달력을 받았다는 건 곧 연말이 들이닥칠 거라는 의미다.

 “들이닥친다”는 표현은 결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가 아니다.  연말이 다가오는 게 기쁘거나 기다려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장도, 추수감사절도, 크리스마스도, 송년회도 다 시답잖다. 연말 분위기에 들뜨지도 않거니와 그럴만한 인맥도, 체력도 준비되지 않았다. 연말이기 때문에 연출되는 "의도적인 훈훈함"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쓸쓸함도 달갑지 않은데, 그렇다고 해서 연말을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겨울이 싫으면 더운 나라로 떠날 수 있지만, "연말"이라는 개념은 어딜 가도 존재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

일 년을 돌아보면 1월에서 3월까지는 좀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은데 눈이 녹고 나뭇잎에 초록이 물들면서부터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고  열대야 때문에 한 보름 뒤척이고 나면 어느샌가 등 떠밀려 새해 달력을 미리 받아보게 된다.  그럼 나 이제 몇 살 되는 거지?


스물이 될 때는 꽤 신났었다.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돼서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가 궁금했다. 재수생활이 끝날 무렵 신촌에서 '오이소주'라는 걸 딱 한잔 맛보았을 때의 두근거림과  내 옆에 있던 선배가 도라지라는 담배를 피울 때 그 연기가 가져오는 메스꺼움도 모두 즐거운 경험이었다.

서른으로 넘어갈 때는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런 류의 진지한 생각을 자주 했고 자존감이 부족한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사람들과 대화할 때 가장 불편한 질문은 [어느 학교 나오셨어요?]다. 그 질문에서 "어느 학교"가 의미하는 것은 중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교다. 졸업한 대학교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의 중고교 시절 학업성적까지 자동적으로 판단되고, 학교의 수준에 맞춰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까지 자동 조절되는 시스템이 한국사람들의 뇌에 장착되어 있다.  그래서 일류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 질문이 매우 껄끄러웠다.  어느 학교를 나왔든지 상관없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은 꾸준히 궁금해했고, 학연으로 이어진 인맥은 의외로 넓고 탄탄했다. 다들 아니라고는 하지만 분명히 그랬다. 어떻게 하면 출신 대학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오래 고민한 끝에 대학원에 진학했으니, 앞으로는 [(제가 바로 그) S대 대학원 나왔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겠구나. 하하하! 됐어! 5학기만 기다려라. 나도 이제 떳떳하게 학교 이름을 말하게 될 테고 콤플렉스가 해결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 어느 학교 나오셨어요?

- (그래. 그게 바로 내가 기다렸던 질문이다!) 네. S대 대학원 졸업했어요

 - 아~ 그러시구나

- (은근 뿌듯. 하하하하하)

-  그럼, 학부도 S대 나오신 거예요?

-  예??  (뭐지? 이건 생각지 못했는데.....? 학부를 물어볼 줄이야...)


5학기 동안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얻은 석사학위는 관심도 없는 듯  사람들은 다시 [대학원은 됐고, 니가 어느 대학출신인지 냉큼 말하란 말이다!]하는 눈빛이었다. 내가 생각한 방법으로는 출신 대학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대학을 다시 들어가야 하나? 그럼 사람들은 [왜 대학을 다시 가셨어요? 원래 어디 졸업하셨는데요?]라고 물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질문을 안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콤플렉스를 이겨낼 수 있을까?  그 방법은- 나이를 먹는 일이었다.

30대 중후반이 넘어서면서부터는 그 사람의 출신학교를 묻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특별한 상황에서 이야기의 주제가 되기는 하지만,  어느 학교를 졸업했느냐와 상관없이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저는 별로 좋은 학교가 아니라서"라는 식으로 답변을 피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으며, 상대방도 눈치껏 그 질문을 내 앞에서 치워주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남들은 별 뜻 없이 묻고 대답하는 것들을 나 혼자만 천둥소리처럼 크게 듣고 과민 반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억지로 찾아낸 해결방법은 단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잠깐 덮어둘 뿐 내 마음의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시간에 맡겨야 한다.  이문세도 노래했듯이 "종이비행기 접듯이 마음을 접고, 내가 못하는 건 시간에 맡겨"야 한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거나 사라지거나 잊혀진다.


그렇다고 해서 40대가 되면 아무 고민도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건 아니다. 30대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인생의 방향에 관한 추상적인 고민이라면, 40대가 고민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는 훨씬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밥벌이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출세/ 양심/ 자유/ 돈/ 인간관계/ 사회적 위치/ 외모/ 육아/ 건강/ 다양한 표지판이 고비고비에 놓여있다.  나만 잘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나와 얽혀 있는 것들을 고려하고 배려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까지 져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와 더불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느냐"의 영향도 받게 된다. 2-30대를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40대 이후의 삶이 영향을 받게 되고,  50이 넘으면서는 그 모습 그대로  서서히 굳어지게 될 것이라 더욱 조심스럽다. 찰흙놀이로 치면 20대에 희미하게 그려놓은 밑그림을 토대로 30대에 뼈대를 만들고, 40대에 모양을 갖추어서 50대부터는 잘 굳어갈 수 있도록 다듬는 과정이 남아있다. 그래서 40대가 중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동료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K는 술과 담배와 독서를 즐기며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이다.  수년 전 K가 SNS를 즐겨하던 시절, 굵고 짧은 글을 자주 썼는데 그중에 내가 따로 메모해둔 내용이 있다. 아마 K가 30대 후배들과 대화를 나눈 뒤에 쓴 글인 듯싶다.


서른은 미래가 힘들고 마흔은 현실이 힘들고.

서른은 마음이 괴롭고 마흔은 몸이 괴롭고.  

서른은 세상이 불만스럽고 마흔은 자신이 불안하고

                                                (by K.H.S)


미래나 현실이 힘들고, 마음이나 몸이 괴롭고, 불만도 많고 여전히 불안한 우리들 앞에 이제 곧 연말이 들이닥칠 것이다.  한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반성하고 감사하기를 강요당하는 12월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밀물처럼 덮쳐오겠지. 그래 봤자 그게 그거고, 어차피 지키지 못할 약속들로 스스로를 속이며 매년 나이를 먹을 테지만, 그래도 부디 내년에는 올해보다 10원어치쯤 더 괜찮은 어른이 되길 기대하며 연말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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