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자.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어제는 내가 좋아하는 술친구 둘과 만났다.
오후 5시. 오향장육과 칭다오 맥주 큰 걸로 네 병.
오후 6시 반. 골뱅이무침과 오뎅탕.소주 두병. 맥주 여덟 병. 서비스 안주로 황도와 쥐포구이.
12시. 안주 없이 생맥주 한잔 반.
멀쩡하게 잘 들어와서 렌즈 빼고, 클렌징하고, 비타민 세럼과 수분크림까지 듬뿍 바르고 침대에 누웠다. 몸에 열이 올라서 이불을 걷어차면 한기가 몰려왔고, 다시 이불을 가랑이 사이에 휘감으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속이 탔다. 벌떡 일어나 냉장고까지 걸어가는 동안 머릿속에서 알코올이 찰랑거렸고, 목이 뜨거웠다. 바나나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자리에 눕지만, 잠이 오지는 않는다. 술자리에서 나눴던 말들 중에,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과 그 순간에 미처 하지 못해 아쉬웠던 말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아가다보면 베갯속으로 까무룩 하게 끌려 들어가다가도, 곧 취기가 남아있는 몸을 계속 뒤척이게 된다. 누워있는 것도 힘들고 움직이기는 싫고, 아무 생각이 없다. 예전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마신 양도 아니고,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먹었는데도 이렇게 힘들다니. 40대에게 과음 다음날은 너무 힘들다.
나는 술을 늦게 배웠다.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술을 마실 일은 거의 없고 관심도 없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과선배들이 마련한 신입생 환영회는 막걸릿집에서 사발식으로 이뤄졌는데, 내게 주어졌던 한잔의 막걸리도 다 비우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선배들은 우리를 환영할 생각은 별로 없어 보였고 쉴새없이 막걸리 항아리를 새로 채웠다.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홀짝홀짝 입술만 적시며, 안주에 집중하다가 본격적인 음주생활을 시작한 건 서른이 넘어서부터였다. 특히 32세 무렵에는 거의 매일 밤 마셨던 걸로 기억한다. 술이 좋아서라기 보다 그 무렵 함께 일했던 멤버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좋아서 마셨다. 그때 함께 했던 멤버 중 한 명이었던 후배는 그 당시의 '주당'인 나 때문에 매우 힘들었다는 뒷얘기를 하고 다닌다는 걸 10여 년이 흐른 뒤에 전해 듣고 몹시 서운했다. 후배들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관심의 표현이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 분위기에서 조금 소외되고 있는 후배들을 챙겼고, 술자리를 통해서 일할 때의 긴장감을 좀 풀어보자는 의도에서 권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누군가에게는 괴로움이었다니. 반성했다. 모두 다 내 마음 같을 수는 없는 거니까.
어찌 됐던 내가 한참 음주문화에 빠져 지낼 때, 부서 전체 회식으로 모인 적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 우리 부장님은 40대 후반쯤 되셨던 걸로 기억한다. 사람 좋고 생각이 유연해서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그 부장님은 부서원들에게 술을 따라주기만 하고 정작 본인의 술잔은 아주 천천히 비우셨다. 술은 마실 때는 좋은데, 이튿날이 너무 괴로워서 가능하면 자제한다고 하셨다. 마실 때는 좋은데 그다음 날이 괴롭다고 해서 안마시다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술은 그 재미에 마시는 거지이~ 이튿날은 나도 괴롭다 이 말입니다. 부장님, 마셔! 짠!
숙취가 걱정이라 술을 자제한다는, 말같지도 않은 말을 한귀로 흘려버렸다. 밤새 정종을 마시고 이튿날 출근해서 아침 프로그램 생방송을 하다가, 중간에 화장실로 뛰쳐나가 맑은 물을 폭포수처럼 오바이트 하고 돌아오기도 했고, 편의점에 들러 여명 808을 마시고 출근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좋았다.
아, 그런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건강검진에서 엄중한 진단을 받은 것도 아닌데!
술이 점점 줄기 시작한다.
같은 양을 마셔도 좀 더 빨리 취하기 시작했고
예전처럼 급하 마시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예전보다 숙취는 오래갔다.
그 변화는 마흔이 넘어서면서부터다. 젠장.
술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헛개 음료수나 망고주스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새벽에 일어나 병째로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시면서 생각한다. 아. 그때 부장님이 말했던 "이튿날의 괴로움"이 이런 것인가. 아침이 지나고 오후가 되도록 얼굴이 화끈거리고, 식욕이 생기질 않는다. 억지로 떠 넣은 북엇국이 그나마 속을 다스려준 덕분에 해장 똥을 시원하게 쏟고 나면 그나마 몸에서 얼추 나쁜 기운이 빠져나간듯하다. 그리고 다짐한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많이는 마시지 말아야지. 30대에 느꼈던 숙취와는 클라스가 다르다! 30대는 감히 40대의 숙취를 짐작하지 말라!
몸이 괴롭다는 걸 인식하다보니 예전보다 술자리의 기회도 줄었고 주량도 줄이려고 한다. 노력도 조금은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는 게 신기하다. 맥주 서너 잔도 버거울 때도 있다. 물론..... 그러다가 어제처럼 발동 걸리면, 끝장이지만!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쭉.
인간의 몸은 70%가 물로 이루어졌다는 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70%의 수분에 적당량의 알코올이 들어가서 뒤섞이면서 온몸이 울렁울렁 찰랑찰랑하다. 지난밤에 함께 한 멤버들도 나와 같은 상황인 듯 하다. H는 [이제 절주 해야 할 나이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A는 [머리 아프다. 술병에 감기까지!]라고 하는 걸 보니 내 상태랑 별반 다르지 않은가 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멤버와 함께라면 언제든 (일단, 오늘내일은 좀 지나고....) 다시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술은 '누구와 마시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낯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인 술자리는 선호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그 자리에 모이게 될 멤버부터 확인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술자리에만 참석하려고 한다. 여럿 중에 한두 명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 편한 사람. 말이 통하고 유머가 먹히고 덜 진지한 사람. 그 사람의 취한 모습을 보는 게 즐겁고, 내가 좀 흐트러져도 부끄럽지 않을 사람- 그들을 만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지, 술을 위한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마흔이 넘으면서는 주종이나, 안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해진다. 이토록 더디게 회복되는 내 간을 담보로, 맘에 안드는 이들과 건배를 할 이유는 없을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술친구들이여. 우리 또 만취합시다. 따뜻한 마음으로 짠!